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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 뒷날 풍경ㅣ올해의 책, 『전상(翦商)』 – 야만에서 탈피하기

 

2024-12-19


최은 출판 기획자

지방에서 나고 자랐지만 생의 절반 이상을 서울시민으로 살고 있다. 사회생활은 노동계에서 시작했고, IT업계를 거쳐 몇 권의 책을 기획했다. 어쩌다 보니 10년째 야간 노동을 하면서 사람들을 만난다.

 

이렇게 또 한 해가 간다. 말 그대로 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한 해가 아직 숨을 몰아쉬고 있다. 새 해를 맞이하기까지 또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올 해의 마지막 칼럼은 그래서 내 마음대로 선정한 ‘올해의 책’ 한 권을 소개하고 싶다. 지금과 같은 상황을 예견했던 것은 아니지만, ‘올해의 책’ 『전상(翦商)』(한국판명은 『상나라 정벌—은주 혁명과 역경의 비밀』, 글항아리, 2024)은 상당히 무겁고 고어(Gore)하다.


멜 깁슨의 영화 <아포칼립토>


이제는 완전히 노인이 되었지만, 전성기 멜 깁슨(Mel Gibson)은 대단했다. 그의 필모그래피는 70년대의 <매드맥스>와 80년대의 <리썰 웨폰> 시리즈와 같은 액션영화로 대표되지만, 그가 감독한 일단의 영화 역시 괜찮은 평가를 받았다. 아카데미감독상을 수상한 <브레이브 하트>를 필두로 한 영화 중 내 기억에 가장 강렬하게 남은 것은 2006년 작 <아포칼립토(Apocalypto)>다. 1521년 중미 아즈텍제국의 최후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에서 주인공과 그가 속한 부족은 아즈텍의 이른바 인신희생의식(人身犧牲儀式)의 제물이 된다. 여기서 묘사되는 의식은 대단히 사실적이다. 희생자의 가슴을 절개하고 심장을 꺼내어 신에게 바친다. 무수한 희생자의 피는 돌로 된 홈을 타고 강물처럼 흐른다. (영화에선 묘사되지 않지만) 희생자의 고기는 마치 제수음식처럼 섭취되고, 골수까지 빨아 먹힌다. 아즈텍제국의 멸망 원인을 따질 때, 빠지지 않는 것이 불과 1천여 명으로 추정되는 코르테즈 원정대에 협력한 주변 부족들의 반란이다.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협력의 주요한 원인이 잔혹한 인간희생에 대한 반발로 본다. 오늘날 이런 희생의식은 공식적인 역사에서 아주 간략히 스케치될 뿐이다. 가톨릭은 질병으로 격감한 원주민들의 의식세계를 완전히 점령했고, 과거의 기록이나 기억은 삭제되고, 망실되었다.


인간희생이란 야만


그러나 이런 종류의 잔혹한 야만은 인류 역사의 어떤 보편적인 경로일 수도 있다. 구약성서에서 아브라함은 신에게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명받는다. 아테나이의 영웅 테세우스는 크레타에서 인간희생을 일삼는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퇴치한다. 무수한 신화와 동화, 설화 그리고 고고학적 증거는 이러한 인간희생의 야만에서 탈피하는 인류의 역사를 암시한다. 물론 이것을 완전히 보편적인 것으로 보는 것은 견강부회(牽强附會)이겠지만.


리숴 지음, 홍상훈 옮김, 『상나라 정벌—은주 혁명과 역경의 비밀』(원제는 『전상(翦商)』, 글항아리, 2024)

상주(商周) 교체기의 혁명


오늘 소개하는 책 『翦商- 상나라 정벌』은 주를 제외하더라도 거의 9백 페이지에 달하는 대작이자 노작(勞作)이다. 지은이 리숴는 이 대작을 통해 대략 3천여 년 전(기원전 1046년 상의 멸망을 기점으로) 이른바 상주(商周) 교체기의 역사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오늘날 중국이라는 거대한 정체성이 형성된 계기가 된 주나라의 건국과 계승이 왜 그저 왕조의 교체 혹은 정치적 격변을 넘어선 혁명적 사건이었는지 갈파하는 리숴의 주장은 무수한 고고학적 증거와 문헌상의 비정을 통해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비록 책은 두껍지만, 마치 소설이나 르포르타쥬를 읽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생생한 묘사, 그림과 지도, 사진 덕택에 술술 읽힌다. 역사를 인문학적으로 보고 싶은 독자라면 정말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기에 추천한다. 물론 많이 잔인하다. 청소년과 임산부는 반드시 피하는 것이 좋을 것!



정상 사망자와 인간희생자의 비율은 65:100


방대한 책을 자세히 언급할 수는 없고 단지 내가 인상 깊었던 장면들 셋만 적어 보겠다.(약간의 스포임을 감안하시라.)


첫째, 상나라의 유적에서 발견되는 인신공양제사에 바쳐진 인간 희생자의 숫자는 수도인 은허의 전체 인구에 비해서 어느 정도였을까. 대략 은허의 왕릉구역에서 발견된 상나라 왕의 제사갱은 2000개 남짓이며, 개중에서 1400개 정도가 이미 발굴되었다. 구덩이마다 적어도 평균 5명(보수적으로 잡은 숫자)이고, 전체 인간희생의 수는 1만명을 넘는다. 이 제사갱의 사용 시기는 약 2백 년에 걸쳐 있는데, 당시 누적 총인구는 약 100만이기에 그 비율이 100:1이다. 문제는 이것이 단지 지금 온전히 발굴된 숫자에 불과하며, 이것조차 순장된 사람이나 제사갱을 제외한 왕릉구역, 각 취락에 묻힌 희생자는 제외한 숫자이다. 다른 방식으로 비교할 수도 있다. 해당 구역에서 정상적인 무덤은 약 6500개인데, 이렇게 비교하면 정상적인 사망자와 인간희생의 비율이 65:100이다. 아마도 실제의 수치는 이 사이 어느 정도였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러한 인간희생자는 그저 온전히 묻힌 게 아니다. 사지는 절단되고, 머리만 묻히거나 심지어 조각조각 해체되어 섭취된 흔적이 있거나, 쪄지기도 하고 육젓으로 담가졌다.


주문왕과 무왕, 주공 단이 한 일


둘째, 그렇다면 상나라는 단지 야만으로 피칠갑을 한 족속이었던가.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인간희생을 제외한다면, 상나라는 문자를 발명하고, 청동기시대를 열었으며 전차와 수레를 도입한 중국문명의 물질적 시조 국가이다. 그들의 인간희생은 종교적 제의를 통해 체제를 유지하는 방식이었다. 여기에 맞서 오늘날 우리가 중국이라 부르는 정체성을 나은 주나라는 정말 보잘것없고 미약한 족속이었다. 상주 교체기의 결정적 계기인 ‘목야(牧野)의 전투’ 당시 상과 주의 총인구수는 대략 100만대 10만으로서 10:1의 전력차가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 엄청난 전력차를 딛고 주가 승리할 수 있었을까. 리숴의 설명에 따르면, 주문왕과 무왕, 주공 단에 이르는 수십여 년간 주나라는 명분을 쌓고, 조금씩 영역을 넓혀 갔다. 그들이 영입하고 포섭한 협력자를 대표하는 사람이 강태공(바로 그 태공망 여상)이고 기자(기자조선의 기자)였다. 그렇게 역사는 전환되었다.


그들의 ‘주역(周易)’은 생생하다


셋째, 오늘날 ‘주역(周易)’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지는 동양사상의 한 흐름은 도대체 어떤 경로로 나타난 것인가. 일반적으로 역경은 주문왕이 기초를 잡고, 주공 단이 설명을 붙였으며, 공자와 그 제자들이 정리한 Text이다. 리숴는 주문왕 주창이 상나라의 점복(우리가 무수한 갑골을 통해 익숙한)을 배우고 괘(卦)와 효(爻)를 중심으로 개조하였다고 주장한다. 이런 그의 주장은 각각의 점괘에 대한 설명을 주문왕 주창이 겪거나 예측했던 상황과 결합한 해석을 통해 제시된다. 이런 그의 설명은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내용(공자와 제자들이 제시한)과 분명히 다르지만, 숨이 멎을 정도로 생생하다.

중국 하난성 안양에 있는 상나라 유적지(은허殷墟)에서 발견된 갑골과 함께 뭍힌 유골. 사진_xiquinhosilva, 위키커먼즈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26193-Anyang_(49085866773).jpg)

야만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읽고, 쓰고, 말하고, 생각한다


서두에서 언급했다시피, 내란과 탄핵으로 시끄러운 국내 정세는 계속 요동칠 것이다. 러-우전쟁의 유탄은 시리아의 아사드정권을 40여 년 만에 축출해 버렸다. 새해에는 트럼프가 또 다른 변화를 일으킬 것이다. 인간이 지구에서 살아가는 한, 변화는 피할 수 없다. 야만에서 또 다른 야만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읽고, 쓰고, 말하고, 생각한다. 이것이 3천 년 전 주문왕이 했던 것이다. 갑진년(甲辰年)이 가고, 을사년(乙巳年)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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