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13
출사의 변
철학자는 통상 시공을 너머 ‘보편적 학’을 추구하지만, 그가 살아가야만 했던 시대와 장소와도 분리될 수 없다. 이런 이유로, 현대 중국 철학자 열전(列傳)을 쓰면서 중국 근현대사와도 동행한다. 한 학자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사승 관계인 학맥, 집안 내력인 가학도 같이 살펴봐야 한다. 그리고 그가 지향하는 학문적 목표가 무엇이며, 또 그 방법이 무엇인지 검토해야 그의 전모가 드러난다. 이를 통해, 우리가 중국에서 무엇을 취사선택할 것인지 묻고자 한다. 중국은 늘 우리 가까이에 있었고 앞으로 그럴 것이다.
윤지산
퇴락한 고가에서 묵 가는 소리와 댓바람을 들으며 성장했다. 선조의 유묵을 통해 중국학을 시작했고, 태동고전연구소에서 깊이를 더했다. 한양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인민대학교 등지에서 공부했다. 『고사성어 인문학 강의』, 『문명이 낳은 철학, 철학이 바꾼 역사』, 『한비자 스파이가 되다』 등을 썼고, 『순자 교양 강의』, 『법가 절대 권력의 기술』, 『어린 왕자』 등을 번역했다. 또 『논어』, 『도덕경』, 『중용』을 새 한글로 옮겼다. 바둑에 관심이 많아 〈영남일보〉에 기보 칼럼을 연재했다. 대안 교육 공동체, 꽃피는 학교 등 주로 대안 교육과 관련한 곳에서 강의했다. 현재 베이징에서 칩거하며 장자와 들뢰즈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한국 사회 저변에 흐르는 무의식을 탐구한다.
중국은 철학자도 많지
중국은 땅덩이 크고 사람도 많다. 한국이라면 이 사실을 모를 리 없겠지만, 그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우리 감각에 직접 와닿지 않는다. 필자가 공부한 런민(人民, 인민)대학교를 실례로 들어보겠다. 우리가 보통 아는 동서철학과는 모두 인문대학원 소속이다. 런민대학교에는 철학대학원이 따로 있고 그 아래 세부 전공 학과 10개가 있다. 전임 교원은 대략 100여 명이고, 한 해 배출하는 철학박사가 60명 내외이다. 이 숫자는 한국 전체에서 배출하는 철학박사 수보다 많을 것 같다. 물론 중국 국내 대학이 모두 그런 것은 아니다. 런민 대학이 철학과 순위에서 매년 1위이므로 특수한 상황이기도 하다. 런민대학교에 진학하려면 출신 성(省)에서 최상위 성적이어야 한다. 과장하자면, 한국 전체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들어야 한다고 할까?
사람이 많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다. 이를테면 이창호, 이세돌 같은 불세출 기사는 중국에 바둑 기사가 아무리 많더라도 잘 나오지 않는다. 구리(古力, 고력)도 커제(柯洁, 가길)도 최상급이지만 이창호, 이세돌만큼 세계대회에서 성적을 내지 못했다.
『주자평전』, 『양명평전』을 지은 그 철학자
마찬가지로, 철학박사가 무수히 많더라도 학문적 결과를 성취하는 이는 드물다. 수징난(束景南, 속경남 1943~2024) 선생처럼 역대급, 중국식 표현으로 말하자면 ‘광세저작(曠世巨著)’ 남긴 것은 차라리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사건이다. 『주자대전(朱子大传)』, 『양명대전(陽明大传)』을 두 권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 두 책 모두 한국에서 김태완 선생이 번역했다. 이 역시도 희유의 사건이자 고난의 행군이었을 것이다. 『주자평전』(역사비평사), 『양명평전』(역사비평사)는 중국 철학에 관심 있는 이에게 일독을 권한다.
‘십 년 책상에 앉아 있으면 헛된 문장을 쓰지 않을 것이다’
수징난은 강소성(江苏省) 단양(丹阳) 출신으로 1962년 남경(南京)대학교 역사과에 입학한다. 중국식 지명과 인명의 표기에 대해서 미리 양해의 말씀 구한다. ‘江苏省’은 현대 중국 발음은 ‘jiāngsūshěng’인데, 이를 ‘지앙수성’이라고 쓰면 한국인에 잘 와닿지 않는다. 보통 신해혁명(辛亥革命, 1911년)을 기준에 두고, 이전은 한국식 발음으로 이후는 중국식 발음대로 적는다. 관례를 무시하고 한국인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방식을 택하겠다. 이때 한루린(韩儒林) 선생이 ‘십 년 책상에 앉아 있으면 헛된 문장을 쓰지 않을 것(板凳甘坐十年冷,文章不写一句空)’라고 충고하자, 이를 평생 가슴에 품었다고 한다. 1978년 상해 복단(复旦)대학교 중문과에 석사과정으로 입학한다. ‘1978년’이라는 ‘연도’를 잘 기억해 주기 바란다. 현대 중국 학자를 소개하려면 이 해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문화혁명(文化革命)’이 끝나고 ‘하방(下方)’에서 청년들이 ‘학교’로 복귀하는 시점이다. 문화혁명을 두고 한국인 대부분은 부정적으로 인식하는데, 꼭 그렇지만 않다는 것을 차차 이야기하겠다.
전사서(前四史)’를 통독하다
이 시절 또 중요한 은사를 만난다. 장톈수(蒋天枢) 선생, 그의 스승은 중국 현대 최고 천재라는 칭송하는 천인커(陈寅恪, 진인각)이다. 이 하늘이 내린 수재도 곧 다루겠다. 중국이 크긴 크지만, 한국과 마찬가지로 학맥이 얽히고설켜 있다. 마치 그물코처럼 이 인물을 들어 올리면 다른 이들도 따라온다. 『진인각, 최후의 20년』(박한제 역, 사계절) 같은 책이 이미 국내에 번역되어 있다. 장 선생은 “‘선진양한(先秦兩漢―진나라 이전과 서한과 동한)’의 문학을 공부하려면 고문자에 밝아야 한다”라는 가르침을 주셨다고 한다. 이에 수징난은 ‘갑골(甲骨), 금문(金文), 『설문해자(說文解字)』, 『사기(史記)』, 『전한서(前漢書)』,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 소위 전사서(前四史)’를 통독했다. 철학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필로로기(philology)’를 이 시절에 착실하게 쌓는다. ‘필로로기’란 보통 ‘문헌학, 언어학’이라고 번역하는데, 여기서 ‘한 언어에 대한 깊은 이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중국인에게도 매우 신산한 작업이라 상당한 인내심을 요한다. 중국인이라도 자기네 고문(古文)을 줄줄 읽을 수 없다. 이 성과가 바로 학문적 결과로 나온다.
석사 과정 중에 A급 학술지에 논문 3편을 쓰다
1979년 당시 권위지인 『철학연구(哲学研究)』에 「장자 철학 체계의 구조를 논함(论庄子哲学体系的“骨架”)」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당시 「소요유(逍遙遊)」을 중심으로 『장자』를 해석하는 시점이 정확하지 않다며, 장자의 유심주의 철학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대종사(大宗師)」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당시 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선사한다. 이를 여러 매체에서 다투어 보도했고, 나아가 『철학연구』는 특별히 “장자연구(庄子研究)”라는 파트를 특별히 신설한다. 곧바로 『철학연구』에 「다시 맹자 철학적 사상을 논함(也论孟子的哲学思想)」, 『역사연구(历史研究)』에 「양웅 『태현경』 창작 연대고(扬雄太玄创作年代考)」를 잇달아 발표한다.
1979년이면 아직 석사 과정 중에 있다. 석사 과정생이 A급 학술지에 논문 3편을 게재한 것은 전무후무한 사건이라고 한다. 선생은 말년에 “이 기록은 아직 깨지지 않고 있다”라며 자랑스러워했다는 후문이 있다. 물론 당시가 문혁 직후라는 시기를 감안해야 한다. 소위 홍위병이 학교도 때려 부수고, 선생도 폭행했으며 고적과 문화유산을 불태웠던 시절이었다. 아직 체계가 잡히지 않아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 만큼 그만큼 쉬웠다는 뜻이다. 지금은 중국 국가 공인한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하려면 박사생이라도 아무리 빨리 잡아도 최소 6개월 이상이 소요된다.
오도(悟道)의 순간이 찾아오다
석사를 마친 1981년 곧바로 소주(苏州)대학교 중문과 교수로 부임한다. 이 역시 지금이라면 박사학위 없이 전임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선 박사생이 너무 많다. 현재 중국 대학의 편제는 한국과 달리 보통 석사 3년, 박사 4년이다. 대개 20대 후반 늦어도 30대 초반에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중국에는 ‘국방의 의무’가 없어 우리보다 훨씬 빠르다. 이른 나이에 학위를 하고, 30대 초중반에 전임이 되므로 이들이 한국 학자보다 학문적 성과를 많이 내는 것은 ‘당연지사(當然之事)’이다. 이 시기 그에게 ‘학문적 전회’가 찾아온다. 마치 ‘오도(悟道)’처럼.
첫 글이라 사설이 길었다. 다음 편에 ‘전회’에 대해서 이야기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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