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이 준 선물, 크리에이티브
강진에서 태어나 대학을 목포로 갔다. 세계지리를 좋아했는데 건축학과를 가게 됐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서 건물을 그리는 것도 잘했다. 졸업하고 강남 삼성동의 건축사무소에서 일했다. 노는 것을 안 좋아해서 학교에서 먹고 자면서 공부만 했다. 친구들처럼 비싼 건축 잡지 살 돈도 없고, 컴퓨터도 없어서 손으로 설계했다. 가난이 나한테는 도움이 됐다. 남의 작품을 보지 못하니 따라할 일이 없었다. 나만의 아이디어가 있어야 했다. 컴퓨터라는 도구가 없으니 깔끔하고 완벽하지 않지만 ‘컨셉’이나 모티브를 살려서 스케치하다 보니 조금 다른 질감이 있어서 성적을 잘 주신 것 같다. 5학년 때 설계한 것 중에 ‘태양을 따라 움직이는 건축물’이 있었다. 햇빛이 안 드는 게 안타까웠다. 층마다 각각 태양을 따라 돌게 설계해서 항상 건물이 일정하지 않고 달라 보인다. 상상이었는데, 두바이에 생겼다.
건축에 자연을 끌어오다
학교 때 체육관를 설계한 적이 있다. 친구들은 네모난 체육관을 만들고 있었다. 체육은 피가 돌고 역동적이라고 생각했다. 체육관 컨셉을 곤충 한 마리가 탁탁 튀어가는 모습으로 잡았다. 곤충 다리가 하나의 아치가 되고 기둥이 되는 식이다. 곤충의 날개가 겹겹인 걸 지붕으로 표현했다. 자연은 완벽하다고 늘 생각했다. 일정한 규칙이 있지만 똑같은 것이 없다. 자연을 모델로 해서 건축하면 완벽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 강했다. ‘벨크로 테이프’라고 하는 ‘찍찍이’ 부직포가 있다. 숲에서 옷에 달라붙어 잘 안 떨어지는 식물을 보고 누군가 만든 것이다. 일본의 신칸센도 물총새가 빠른 속도로 물속으로 다이빙할 때 물이 거의 튀지 않는 걸 보고 생각해 냈다. 건축은 완벽해야 하는데, 자연이 완벽해 보였다. 자연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뭔가 있었다. 자연을 스케치하는 걸 좋아했다. 건축물의 자아를 형성하고 정체성을 찾는 데 자연이 동기를 부여해 주었다.
강남 한복판에서 아파트를 설계하다
2008년 졸업하면서 국내에서 손에 꼽힌다는 건축사무소에 취직했다. 2013년까지 6년 정도를 미친 듯이 설계했다. 연봉도 높았다. 학교 다닐 때도 1학년은 일주일에 한 번 밤새고, 2학년은 일주일에 두 번 밤샌다고 했다. 집이 역삼동이었는데 저녁 먹고, 다시 회사 가서 밤새고, 퇴근을 몰랐다. 내 삶이 정해져 있는 듯했다. 회사 사람들은 쟁쟁한 엘리트들인데 다들 저녁이 없는 삶을 살았다. 현상설계가 힘들었다. 마감 한 달 전부터 매일 새벽까지 일했다. 충격을 크게 받았던 일이 세종시 아파트 설계였다. 자연은 스스로 정화하고 그 자체로 생명이다. 자연을 닮은 건축을 하고 싶었다. 어릴 때 자연을 보면서 성장하면 진리가 무엇인지 안다. 그래서 인위적으로라도 자연을 넣는 것이다. 세종시는 원래 논도 있고, 자연이 풍요롭던 곳이다. 여기를 다 밀어 내고 끝이 보이지 않게 모래를 깐 다음, 그 위에 아파트를 세우는 걸 설계하는데 이상한 허탈감이 들었다. 건축 활동을 하다 보면 자연을 훼손할 수 있다. 그래도 그나마 좀 덜 훼손하면서 자연을 보고 느낄 수 있는 환경이었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막상 보니까 이게 완전히 밀어버리고, 강도 하천도 인위적으로 만들어야 했다. 불편함이 밀려왔다.
땅으로 돌아가다
사람이 흙과 가까이 살아야 한다. 자연과 닿은 접점이 없으면 안 된다. 사람과 닿은 유대감도 필요하지만 자연과 관계 형성을 위해서는 땅과 가까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내가 하는 행위가 30층이 넘는 고층 아파트를 짓는 것이다. 땅과 멀어지고 자연과 멀어질 수밖에 없다. 내가 건축 설계를 해서 자연을 더 밀어낸다는 생각이 컸다. 공동체에 대한 갈증도 있었다. 설계하면서 노인정이나 보육시설, 커뮤니티 공간을 그리는 것은 마을 공동체처럼 서로 어우러져 사는 공간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빈 공간으로 남는다. 허탈감이 있었다. 그만둘 때 사장님이 왜 그만두냐고 물어봐서 답했다. 나는 건축의 디자인이 아니라 사회를 디자인하고 싶습니다. 32살이었다. 선택한 곳은 강원도였다.
자연과 가까이, 사람과 가까이
처음부터 강원도를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목조주택을 설계할 요량으로 여기저기 알아보던 중 DMZ평화동산의 정성헌 이사장을 소개받았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이셨다. 생명운동, 평화운동, 환경운동을 하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 2년을 살았다. 농사짓고 공부했다. 자연스럽게 RCE를 하게 됐다. 이제 10년이 넘었다. 운동가가 되라고 하셨는데 아직 활동가라고 생각한다. 건축디자인하던 실력으로 마을 사람이 식당을 한다고 하면 간판디자인을 해 드렸고, 오미자 판다고 하시길래 상표디자인도 해 드렸다. 평생 농사만 지어서 고운 한복 사진 한 장이 없다고 하시길래 포토샵으로 합성해서 영정 사진도 만들어 드렸다. 현수막 디자인도 잘한다.
생태활동가에서 평화운동가로
RCE에서 사무국장을 하고 있다. 지속가능한 이 사회의 모델을 하나 만들고 싶다. 통일이 됐을 때 지금의 자본주의 거대 문명이 아닌 좀 작은 문명, 적정한 문명이 돼야 된다. 작고 서로 협동해서 만들어 내는 그런 사회를 준비하고 있다.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보여 주는 작은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인제군에서는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인제군는 인구 밀도가 가장 낮고 면적이 크다. 산림의 비중도 높다. 군사적으로 접경지대이니 규제와 제약이 많아 개발이 안 되었다. 역설적으로 그 덕분에 많은 생명들이 복원됐다. 생물 다양성은 문화 다양성과 연관이 있다고 본다. 북의 도시들이 인제군과 비슷하다. 인제군에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어 내면, 통일 후에 이 도시모델이 북의 도시에 좋은 사례로 쓰일 수 있다. 전쟁으로 분단으로 인제군는 단절된 길이 많다. 단절된 것은 연결되어야 한다. 그것이 평화다. 사람도 연결해서 서로 돕게 해야 한다. 마을과 마을도 연결해야 하고, 분단으로 단절된 길도 연결해야 한다. 사단법인 '인제천리길'의 시작이다. 단절된 길을 걷는다. 인제가 끝이 아니다.
기자수첩 유엔지속가능발전교육 인제전문센터(인제 RCE)
유엔지속가능발전교육센터(RCE: Regional Centre of Expertise on Education for Sustainable Development)는 유엔이 주도하는 지속가능발전 목표(SDGs)를 실현하기 위해 유엔대학 주도로 전 세계에 설립된 지역 전문센터와 기관들의 글로벌 네트워크다. 이 센터는 각 지역사회의 특성과 필요에 맞춘 지속가능발전교육을 확산시키고,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해 교육과 실천 활동을 통합적으로 수행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RCE는 2005년 유네스코가 주도한 '지속가능발전교육 10년' 국제 이행 계획에 따라 설립되었다. 2016년부터 2030년까지 유엔 총회에서 채택된 지속가능발전 목표에 발맞추어, RCE는 지역사회에서 지속가능한 발전을 이루기 위해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 운영과 실천을 한다. 이로서 현 세대와 미래 세대가 공존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속가능발전교육(ESD)을 통해 개인과 공동체가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해 필요한 가치, 행동, 삶의 방식을 학습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게 RCE의 핵심 역할이다.
인제 RCE는 2011년 지역발전포럼에서 지속가능발전교육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시작되었다. 2012년 유엔대학 인제 RCE 준비위원회가 개최되었고, 그해 유엔지속가능발전교육 인제전문센터로 지정되었다. 이후 2013년에는 인제생명사회실천운동 창립과 함께 민간, 공공, 학계와의 다양한 업무 협약을 체결하여 지역사회와의 협력을 강화해 왔다. 유네스코 학교 가입, 평생학습 우수협력기관 선정, 세계 RCE 우수프로젝트상 수상 등 다양한 성과를 통해 인제 RCE는 교육과 실천의 모범 사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미래를 향한 인제 RCE의 비전은 생산, 소비, 지식, 문화, 에너지 생활, 자연 보호 및 복원이라는 다섯 부문에서 지속가능한 발전을 전면적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인제 RCE는 생명에 이로운 산업 활동으로 전환, 쓰레기 zero 소비 생활, 평화의 가치관과 생명 체계관 확립, 자연 재생 에너지 확충, 멸종 위기 동식물의 복원 계획 등을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인제 RCE는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교육과 실천, 정책 제안을 통해 전 지구적인 생명의 위기 속에서 대안적 삶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유엔지속가능발전교육센터(RCE)는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글로벌 교육 네트워크로서, 현 세대와 미래 세대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지속가능한 사회를 구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인제 RCE는 이러한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지역사회와 긴밀히 협력하며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선도적인 모델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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