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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송희일 | 기후위기의 시대에 춤을 추어라

 

이유경 기자 2024-07-22

이송희일 영화감독
개인을 벗어나 시민으로서 함께 기후위기에 대처하자는 이송희일 영화감독

이송희일 감독은 사회학을 전공했다. 1999년 첫 단편영화를 만든 이후 25년째 영화를 만들고 있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지만 가끔 글을 쓰기도 한다. 기후위기 시대에 춤을 추어라을 출판했다. 영상과 활자는 매체 속성이 다르지만, 이야기를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에게 옛날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졸랐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이야기를 좋아하면 가난해진다’고 하셨다. 틀린 말은 아닌 것같다. 줄곧 가난하게 살아왔다. 그럼에도 이야기꾼이 되고 싶다. 20대 초반, 헨리 데이빗 소로우와 이반 일리치, 그리고 아나키즘을 통해 생태주의를 배웠다. 시골에서 자라나 생태주의자로 쉽게 정체성을 지니게 된 것 같다.





’기후 난민‘이라는 표현을 거부한다


’기후 난민‘이라는 개념에 상당히 조심스럽게 다가가야 한다. UN 이사회에서도 ’기후 난민‘ 대신 ’기후변화의 잊혀진 피해자‘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1951년 제정된 난민 법에 의거하면, 난민의 현재적 정의는 전쟁, 정치적 폭력, 박해를 피해 조국을 등진 사람이다. 세계의 엘리트들은 여전히 ’기후위기’를 전쟁이나 정치적 폭력으로 보지 않는다. 기후위기를 폭력으로 본다면, 북반구 자본주의가 가해자가 되기 때문이다. 해수면 상승으로 점차 가라앉고 있는 도서국가들도 ‘기후 난민’이라는 표현을 거부하고 있다. 수동적 피해자라는 프레임을 거부하는 것이다. 자신들의 고향을 떠나고 싶지 않아, 북반구 자본주의 국가들에게 온실가스 감축을 요청 중이다. 부득이하게 이주하더라도 존엄하고 정의로운 이주를 보장해 달라고 한다. 이들에게는 ’기후 난민‘보다 ’기후 이주자‘가 더 적절한 호칭일 것이다.


"기후 이주자"에 대한 관점을 가져야 한다


1초에 한 명씩 기후 이주자가 발생하는 기후 비상사태에 접어들었다. UN에 따르면 2050년에 12억에서 15억의 '기후 이주자'가 발생한다고 한다. 이는 곧 지정학적 갈등의 원인이 된다. 여전히 이주 혐오가 증가하는 중이며, 이주에 대한 장벽 세우기를 주장하는 극우 정치가 북반구에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 추세는 계속해서 상승할 것이다. 기후 이주는 곧 지구 정치의 불안과 폭력적 지형을 양산한다. 그래서 기후 이주자에 대한 정의로운 관점을 가질 필요가 있다.

탄소 누적 배출량이 1%도 되지 않는 방글라데시의 이주자들은 왜 고향을 떠나 유럽 국경을 향해야 하는가? 탄소 누적 배출량이 0%대에 달하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이주자들은 왜 목숨 걸고 사막을 걸어 지중해를 건너야 하는가? 온두라스와 같은 중미 국가의 이주자들은 카라반 행렬을 이루며 미국 국경을 두드리고 미국의 백인들은 트럼프를 앞세워 파시즘에 가까운 '이주 혐오'를 발산하는 걸까? 부유한 북반구는 이제라도 온실가스 배출량을 급격하게 줄여야 한다. 나아가 남반구 민중들의 삶을 위태롭게 한 대가로서 정당하게 ‘기후 채무’를 져야 한다. 정의로운 이주를 위해 온실가스 대량 배출국들은 그 책임을 다 해야 한다.


불평등한 체제를 제어하는 사회운동이 기후운동이다


한국 시민들은 기후위기에 대한 정보를 많이 숙지 중이다. 그러나 한국인이 접하는 기후위기에 대한 정보는 어디까지나 남의 일이다. 한국은 재난 인프라가 잘 갖춰진 국가다. 파키스탄에서 홍수가 나면 그 물이 빠지는 데 6개월이 걸리지만, 한국에서는 대충 하루면 물이 빠진다. 기후위기를 감각하는 것에는 이렇게 계급적 차이가 존재한다. 사람들은 기후위기를 걱정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아직‘ 내 알 바가 아니라고 느낀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은 자본주의의 소비 양태와 이데올로기, 즉 ’제국주의적 생활 양식‘에 기인한다. 편리함의 향유인 계급적 토대를 버리는 일은 무척 어렵다. 그 와중에 한국은 능력주의를 내면화했다. 이런 사회에서 사람들은' 불평등'을 자연적 상태로 인지한다. 경제적 불평등, 생태적 불평등이 가로지르는 행성에 대한 지구적 사유가 부재하다. 고작 기후위기의 대응으로 색종이 오려 붙인 피켓을 들고 ’지구를 지키자‘ 같은 허무한 구호를 외칠 뿐이다. 기후는 사회적, 정치적 체제와 분리되지 않는다. 지금의 사회정치 체제의 결과가 곧 기후위기이다. 불평등한 체제, 다시 말해 자연과 인간을 약탈함으로써 부를 증식하려는 욕망을 제어하는 사회운동이 곧 기후운동이다.


기후위기에 반격하라!


자본 축적에 대한 맹목적 무한 욕망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경제 체제에 대한 민주적 통제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것이 '생태 사회주의'다. 지구를 먹어 치우는 자본주의 경제를 그냥 놔둔 채 기후위기를 진정시킬 수 있다는 믿음은 허무맹랑한 동화와 같다. 탈성장은 자연과 인간이 서로 돌보며 살아가는 세계에 대한 밑그림으로지금 현재 여기에서, 그려내는 모든 실천을 말한다. 비전과 미래를 현재 속으로 불러들이는 다양한 정치적 실천, 그것이 반격이 될 수 있다. 기후위기를 걱정한다고 기후위기가 사라지지 않는다. 반격할 때이다. 텀블러를 들고 다닌다고 기후위기가 사라질까? 아니다. 반격할 때다. 자칭 기후 전문가와 정치인들이 그리는 탄소 중립 그래프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면 기후위기가 사라질까? 아니다. 반격해야 한다. 인류 유일의 고향이자 터전을 지키기 위해 민중이 힘을 모아 저항하고 새로운 사회로 길을 내야 한다. 사람이 주인이 되고, 생명을 돌보고, 문화와 평등을 고취하는 방향으로 사회의 방향키를 바꾸어야 한다. 소비와 물질적 쾌락보다 공생과 존중의 기쁨을 누릴 때, 우리는 덜 착취하고 덜 죽이며 급진적 풍요를 누릴 것이다. 상품 생산이 아닌 삶의 재생산에 초점을 맞춘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반격할 힘은 개인적 체념에서 벗어나 타자와 연결하는 것이다


기후 생태 위기 앞에 우울증과 무력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자본주의는 우리를 개인화, 개별화 함으로써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하고 그 절망마저도 개인에게 떠넘긴다. 우리의 절망은 대부분 고립에서 온다. 작년 벨기에의 한 남자가 기후위기를 심각하게 우려한 나머지, 인공지능 챗봇과 대화하다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그가 자살이라는 결론을 내렸을 때, 인공지능은 신속한 자살을 부추겼다. 그는 철저히 혼자였고, 혼자 고민했으며, 혼자 절망하다가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생을 마감했다. 신자유주의는 ’사회‘, 그리고 ’광장‘을 추방함으로써 우리를 더욱 외롭게 했다. 많은 이들이 무력감 속에서 고립되는 중이다. 우리는 우정을 복원하고 사회와 공동체를 재구성해야 한다. ’이제는 끝이다‘, ’할 수 있을까?‘와 같은 개인적 체념의 감옥 속에서 벗어나 타자와 자꾸 연결되어야만 반격할 힘을 얻을 수 있다. 생태학은 우리에게 이미 답을 제시하고 있다. 모든 것은 연결돼 있다. 고립이야말로 가장 반생태적인 일이다.


기후위기의 원인은 자본주의다


마리아 미즈(Maria mies)는 에코 페미니스트다. 자본주의가 세 개의 영역을 착취하며 발전했다고 말하는데 자연, 여성, 그리고 남반구다. 자본주의는 이윤 축적을 위해 자연을 쥐어짜 왔고, 여성의 재생산노동을 무불 노동으로 값싸게 대해 왔으며, 남반구를 식민지 삼아 노동력과 자원을 끝없이 수탈해 왔다. 15세기 포르투갈이 아프리카 마데이라 섬에 도착해 불을 지르고 그곳의 자연환경을 전부 파괴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같은 양식의 수탈이 지속되는 중이다. 기후위기의 원인은 우리의 삶을 돌보는 '재생산 양식과 노동'을 억압하고 '자연'을 쥐어짜는 '자본주의'다. 자본주의는 바다와 육지를 쓰레기장으로 만들고, 무한한 상품 생산을 위해 땅속을 헤집어 자원을 추출하고, 대기 속에 온실가스를 풀어 놓음으로써 지금의 행성 위기를 자초한다.


자본주의를 본원적으로 전환하려는 모색이 필요하다


15세기 이래로 부유한 제국들은 남반구의 자연과 노동력을 쥐어짜며 자본주의를 발전시켜 왔다. 이들 국가들은 지금 신자유주의와 부채로 이루어진 글로벌 약탈 시스템을 통해 각종 자원을 수탈하고 있다. 약탈 시스템은 대량의 온실가스를 배출하고 환경 오염을 양산했다. 이들이 풀어놓은 온실가스는 대기 중에 자욱하며, 이들이 배출한 쓰레기의 대부분이 남반구로 수출되었다. 제조업 등의 오염 산업을 남반구로 외주화시켰다. 그래서 피해는 가장 먼저 남반구에서 맞이하게 된다. 부의 불평등에 이어, 기후 생태 불평등이 악화되고 있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본령이다. 자본의 축적은 ‘외부화’ 없이 작동하지 않는다. 돈을 벌기 위해 임금 노동자의 노동력을 저렴하게 착취하듯, 상품의 생산과 소비 과정에서 발생하는 오염을 자연과 인간에게 전가하고, 남반구로 전가시킨다. 자본주의 철폐 없이 불평등한 지구의 풍경은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다. 이제 막 태동한 글로벌 기후정의운동에 대한 관심과 자본주의를 본원적으로 전환하려는 모색이 필요하다.


가장 좋은 실천은 ’개인적‘이라는 개념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모든 것을 상품화하고 사적 소유화하는 자본주의에 반하기 위한 실천이 있어야 한다. 자본주의가 박살 낸 공동체적 관계를 다시 복원해야 한다. 탈자본주의처럼 ‘세계를 어떻게 바꿀까요?’라는 원대한 질문에 얼어붙기보다 지금 발 딛고 있는 현실 세계의 문제를 응시하고 대안을 찾아가는 일련의 사유와 실천이 필요하다. 그리고 연대의 삶이 중요하다. 그 속에서 ’개인적‘이라는 개념은 위험하다. 가장 좋은 실천은 ’개인적‘이라는 개념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시민으로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는 일들이 무엇이 있을지 늘 고민한다. 이런 고민 속에서 앞으로도 계속 이야기를 해 나갈 계획이다. 내가 할 줄 아는 것은 이야기밖에 없다. 글을 쓰고 강의하고, 사람들과 의논하는 것들이다. 영화를 계속 만들 계획이다. 세상의 종말은 이야기의 끝이다. 계속 이야기를 하는 것, 그것이 유일한 계획이다. 기왕이면 재미있게 이야기를 잘하는 사람이 되어 정확하고 설득력있게 이야기를 전달하고 싶다. 아직은 서툴지만, 죽기 전까지 조금이라도 더 재밌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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