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미 총괄 2024-04-17
윤호섭은 1943년생으로 서울사대부고등학교를 나와 서울대학교 미대 응용미술학과를 졸업했다. 1966년 대학졸업후 합동통신사(현 오리콤)의 광고기획실 아트디렉터가 되었다. 1976년, 대우 그룹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근무했다. 1982년부터 국민대 시각디자인학과에서 제자들을 만나기 시작해 28년간 함께 공부했다.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 디자인전문위원(1982), 대전 엑스포 디자인 전문위원(1990), 세계 잼버리 대회 (1991), 삼성그룹 기업광고 크리에이티브 자문 (1994), 광주 비엔날레 등의 디자인에 참여했다. 펩시콜라의 ‘펩시’ 한글 글꼴 도안은 그의 작품이다.
청년을 만나다
1991년 세계 잼버리대회의 포스터와 유인물 디자인에 참여했다. 설악산 잼버리대회장에서 일본 청년 마사요시를 만났다. 미야시다 마사요시는 당시 일본 호세이대학교 사회학과 3학년 학생이었다. 호세이대학교 환경미술동아리 리더로 환경, 미술에 관심이 있었다. 행사의 포스터와 유인물을 디자인한 디자이너를 만나니까 신이 나서 환경과 디자인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오는데 아는 것이 없었다.
볼런티어(volunteer)라는 단어도 모르고 살았다. 이후 일본도 가고 왕래를 하면서 환경 자료도 보고, 환경 전시회에 같이 가곤 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나무를 심은 사람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을 읽었다. 느낌이 너무 컸다. 깨끗한 물 같은 책이다. 다른 사람들한테도 읽으라고 추천을 하고 있다. 누구에게 어떤 책을 읽으라고 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더구나 필사까지 하라고 한다. 내가 뭐라고 이런 것까지 요구하나 싶지만 감수하고 권한다. 지금은 이제 다들 미리 알고 온다. 전국에서 사람들이 책을 필사해서 보내오기도 한다. 어떤 학교 선생님은 담임 맡은 반 학생들에게 필사하게 하고 그것을 보내온다. 일일이 학생들에게 티셔츠를 한 장씩 그려서 보내준다. 매년 한두 번은 교실에 가서 아이들을 만나기도 한다.
작업실에는 전국에서 보내온 <나무를 심은 사람>의 필사본이 전시되어 있다. <나무를 심은 사람>은 장 지오노의 단편소설로 황무지에 40년 동안 매일 나무를 심은 한 노인의 이야기다. 오랜 시간이 지나 황무지는 숲이 되고, 물이 흐르고, 아이들이 넘쳐 나는 마을이 생긴다. 모두 놀라워했지만 노인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세상에 알려지는 일에 관심이 없던 노인은 매일 나무만 심었다. 전쟁이 나도 나무를 심었고, 사람들이 놀라워하며 감탄하는 그 순간에도 나무를 심었다. 심은 나무가 죽어도 좌절하지 않고 또 심었다. 한 사람의 노력이 거대한 변화를 가져온다는 노인의 이야기는 단순하다. 깊다. 그리고 생각하게 한다. 필사를 하면 그 감동은 더 커진다. 필사는 그가 택한 실천적 행동의 시작이다. 세계젹인 애니메이션 작가, 프레데릭 백은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을 읽고 너무 큰 감동을 받아 영화를 제작했다. 그는 '오랜 세월에 걸쳐 자신의 노력이 헐벗은 대지와 그 위에 살아갈 사람들에게 유익한 결과를 가져오리라 확신했습니다. 그는 대지가 천천히 변해가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 행복했고, 그 이상의 것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바쳐 일하는 사람에게,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 작품이 격려가 되기를 바랍니다' 라고 밝혔다. 캐나다 샤티옹 지방에는 '장 지오노 숲'이 있다. 프레데릭 백이 <나무를 심은 사람>을 쓴 장 지오노를 기리며 만든 숲이다. 캐나다에서는 이 애니메이션으로 나무심기 운동이 일어나 2억5천만 그루의 나무가 심어졌다.
국내 최초 그린디자인 과목 신설
국민대학교에 환경과 디자인 과목을 만들었다. 멋지고, 새롭고, 소비를 늘리게 하는 것이 디자인이다. 기업에 멋진 디자인을 제공하고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제품을 어필해서 물건을 사게 하는 것에만 집중해서 살았다. ‘이러면 안 되겠다, 진정한 의식이 있는 디자이너를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982년부터 전임을 했고 1995년에 학장을 맡았다. 학점을 이수해야 졸업할 수 있도록 학부 교양필수과목으로 만들었다. 조형대학의 전 전공생들이 환경에 해롭지 않은 디자인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의 작업실에는 제자들의 작품이 소중히 전시되어 있다.
녹색여름전
2008년부터 매년 전시회를 한다. ‘녹색여름전’이다. 혼자 하는 전시회가 아니다. 남녀노소가 다 같이 참여한다. <나무를 심은 사람> 필사작부터 어느 할머니가 만든 앞치마도 전시했다. 시집올 때 가지고 온 이불 홑청, 50년 된 천으로 만든 앞치마다. 그는 천연페인트로 나뭇잎을 그려주었다. 해가 지나니까 지워져서 그 다음 해에 옆에 또 그려줬다. 그 다음 해에 또 그려준다. '녹색여름전'은 그런 전시회다. 2024년 녹색여름전에 가보자
최대한 줄이자
그린디자인의 덕목 중에 ‘maximum minimize’, ‘maximum reduction’이라는 것이 있다. 최대한 줄이자는 것이다. 나의 목표는 제로다. 2000년 첫 개인전, 주제는 ‘옷, 우표, 낙엽’으로 했다.
집에 있는 티셔츠를 모두 거실에 가져다 쌓아봤다. 티셔츠만 63장이 나왔다. ‘내가 가지고 있는 옷으로도 평생 충분하니까 이제 옷을 사지 말자’고 마음먹었다. 나의 후손들에게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충무로 상업사진 스튜디오에 옷들을 다 가져가서 하나씩 입고 사진을 찍어 남겼다. 그중 하나를 골라 포스터로 만들었다. ‘이거다’ 하는 생각이 들면 가차 없이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장롱 속에 옷을 쌓아 두고 살았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그 이후 옷을 구매한 적이 없다. 포스터도 인쇄하지 않았다. 공해를 유발하는 인쇄 공정을 피하고 주제 정신을 극대화하기 위해 수백 장의 포스터를 직접 신문지 위에 그렸다. 지금도 그는 작업실 앞에 있는 빵집의 빵종이에 위에 그림을 그린다.
인사동 티셔츠 퍼포먼스
2002년부터 매년 3월 말부터 9월 말까지 한 달에 한 번 인사동을 간다. 이전에는 매주 갔다. 비가 와도 간다. 인사동 티셔츠 퍼포먼스를 보려고 지방에서도 온다. 티셔츠에 천연물감으로 그림을 그려준다. 손수건에도 그려주고 모자에도 그려준다. 티셔츠에 ‘제돌이’를 많이 그려주었다. 제돌이는 2013년 먹이를 쫓다 그물에 걸려 전시동물이 되었다. 돌고래쇼를 하던 제돌이는 3년만에 고향인 제주 앞바다로 돌아갈 수 있었다. 10년 넘게 돌고래를 그려온 그는 제돌이가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 제돌이를 만나러 갔다. 그 자리에서 즉석으로 제돌이를 그려 보여주었다. 제돌이가 그림에 입맞춤을 했다. 그날의 감동을 그는 잊을 수가 없다.
산다는 것, 무엇으로 남을 것인가
책에서 영향을 많이 받는다. 『월든』을 쓴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멋진 디자인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디자인 프로젝트를 해서 돈도 벌 수 있다. 하지만 그것보다 진정한 가치의 디자인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됐다. 책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는 건, 수천 년 전의 사람들이 해 낸 기막힌 생각들이 문장을 통해 전달되기 때문이다. 영혼이 통하는 느낌이다. 장 지오노를 비롯해 영감을 준 분들에게 한없이 고맙다는 생각을 한다. ‘생태맹(生態盲)’이라는 말이 있다. 지식은 있고 환경의식이 없는 사람, 생태의식이 없는 사람이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말하면서 생태맹이 되면 안 된다. 대단한 것이 아니다. 대단한 발견도 아니다. 대단한 인내심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단지 생각하면 된다. 호모사피엔스는 생각하는 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우린 생각할 수 있다. 철학과 성찰의 영역이다. 인류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가치,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능력은 생각에서 나온다. 이것이 인간이 가져야 할 자존심이다. 숨 쉬고 마시고 살아야 하는 자연이 오염되면 독성이 생긴다. 공존해야 하는데 우리가 해를 끼치고 있었다면 멈춰야 한다. 기본적이 도리이고 기초적인 윤리의 문제다. 만물의 영장이 이걸 생각하지 못하면 안 된다. 실감하면 된다. 받아들이는 너그러움, 윤리적 책임감이 교육되어야 한다. 지구가 지금 아프다는 걸 알면 미룰 일이 아니다. 지식인은 다 안다. 각자 할 거 하자. 대안을 묻지 말고 찾아서 하자. 다 알면서 모른척 하지 말자. 이것은 호모사피엔스의 자존심 문제다.
신문지, 빵종이에 이어 이번엔 쓰레기비닐이 캔버스
기자가 취재를 하던 날, 그는 다가올 2024년 개인전 준비에 푹 빠져 있었다. 작업실에 걸려 있는 투명한 비닐에 그려진 제돌이도 구상중의 하나다. 투명비닐 뒤에 파란색 비닐을 겹쳐 강과 바다를 표현할 계획이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식당주인에게 파란색 쓰레기봉투 한장을 얻더니 소년처럼 활짝 웃는다.
동강도 재현할 계획이다. 동강댐을 만들자고 했을때 물한컵 안마시고 절약하면 댐을 안 만들어도 되는것 아닌가 생각했다. 인간의 낭비와 과용을 위해 자연에 더이상 칼을 대지 말자는 생각이었다. 티셔츠와 포스터, 배지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이번에 수십미터의 DDP전시관에 동강을 옮겨올 심산이다. 관람객이 작품의 일부가 되어 작가로 참여할 수 있는 전시를 구상하고 있다. 매일 영감이 떠오른다. 녹색여름전도 같은 공간에서 함께 할 생각이다. 그의 2024년 개인전이 기대된다.
기자수첩
DDP | 동대문디자인플라자
DDP는 연간 천만명 이상이 방문하는 서울의 디자인 중심공간이다. 뉴욕타임지의 '꼭 가봐야 할 세계명소'에 선정되었다. 여성 최초 프리츠커 건축상을 수상한 자하 하디드의 유작 건축물이다. 매년 100건 이상의 전시, 행사가 열리며, 샤넬, 루이비통, BMW, 벤츠 등 유명 브랜드들이 예술활동을 벌이는 공간이다. 서울디자인재단이 운영하며 2014년 개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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