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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 | 머리로 인식하고, 가슴을 움직여 행동으로

 

황희정 기자, 김동혁 영상기자 2024-04-10


최재천 교수는 서울대학교에서 동물학과를 전공하고,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교에서 생태학 석사학위를, 하버드대학교에서 생물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생명과학부 교수,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한국생태학회장, 국립생태원 초대원장, 코로나19 일상회복 지원위원회 공동위원장을 지냈다. 현재는 이화여자대학교 에코과학부의 석좌교수와 생명다양성재단의 이사장을 맡고 있다. 2019년에 전 세계 530명의 필자를 총괄하는 편집장을 맡아 『동물행동학 백과사전』(개정판)을 편찬했다. 그는 『다윈의 사도들』, 『다윈 지능』,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최재천의 공부』, 『통섭의 식탁』 등 수많은 명저가 있다. 1989년 미국곤충학회 젊은 과학자상, 2000년 대한민국과학문화상을 수상했다. 2020년부터 유튜브 ‘최재천의 아마존’을 운영하고 있다. 70만명이 넘는 구독자들에게 인간과 자연에 대한 소중한 이야기를 남겨 주고 있다.


 

과학자를 만나다


평생을 어쩌다가 과학자로 살고 있지만 실은 과학에 재능이 없는 아주 전형적인 문과 성향의 학생이었다. 그 시절은 민족중흥, 과학강국을 외치는 시대였다. 무조건 다 이공계를 보냈다. 수학은 거의 수포자 수준이었다. 아버지가 의사를 하라고 해서 의대를 지망했는데 2년 연속 떨어졌다. 당시 제2지망제가 있었는데 자기가 원하는 학과에서 떨어질 경우를 대비해 두 번째로 원하는 학과를 쓸 수 있었다. 그걸로 동물학과에 붙었다. 공부도 안 하고 지냈다. 대학 3학년 때까지 수업은 손에 꼽을 만큼만 듣고 동아리 회장은 서너 개 맡았다. 학도호국단의 문예부장을 했다. 겨울방학에 고민을 했다. 마지막으로 '꿈틀'은 하고 졸업해야겠다 생각했다. 대학 4학년 때 모든 활동을 접고 생물학과 건물 지하실에 있는 실험실로 들어가 잠적했다. 아주 우연하게 미국에서 온 교수님의 조수역을 맡으면서 인생이 바뀌었다. 60대 중반 정도의 영감님이셨다. 신발도 안 벗고 개울물에 첨벙첨벙 들어가 하루살이 유충을 잡아다 병에 넣고 하는데, 남의 나라에 와서 참 할 짓도 없다고 생각했다. 영감님의 말씀이 그것이 자기 직업이라고 했다. 동물분류학을 하는 교수님인데 일주일 동안 그분을 눈으로 보면서 깨달았다. 저것도 직업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심하고 그분에게 당신처럼 살고 싶은데 방법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교수님이 어이없는 표정을 짓더니 미국 유학 오는 방법을 설명해 주었다.


하버드대 사회생물학 창시자의 제자가 되다


펜실베니아 주립대학교 대학원의 생태학부에 입학했다. 예전부터 주변을 아주 많이 살피는 타입이었다. 오죽하면 아는 사람들이 종종 '오늘은 얼마를 주웠냐'고 물어 왔었다. 세상일에 관심이 많았다. 문과를 갔으면 사회학을 했을 거다. 미국에서 사회생물학 수업을 듣고 이것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원래 혼자 사는 동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이상하게도 딱정벌레가 여러 마리 모이고, 진딧물이 오글오글거리면 관심이 생겼다. 모여 사는 동물들은 왜 모여 살고 뭘 하며 살까, 이런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 성격과 너무 잘 맞았고 그 길로 지금까지 쭉 달려 왔다. 사회생물학을 발견하고 나서 매일 혼자서 공부했다. 사회생물학은 박사과정에서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석사를 빨리 마칠 주제를 찾고 있었다. 곤충학과 교수 한 분이 꼬드겼다. 얼려 놓은 알래스카의 바다새 사체를 꺼내서 삶고, 거기 붙어 있는 기생충을 걸러내 조사해서 논문을 쓰면 6개월이면 학위를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그때부터 매일 갈매기를 삶았다. 냄새가 지독해서 난리였다. 교수님은 알래스카에서 더 많은 새를 잡아 왔다. 결국 석사하는 데 3년이 걸렸다. 1년 반만에 어떻게든 빨리 마치고 다른 대학으로 가려고 했던 건데, 두 배가 걸린 셈이다. 하버드대학교로 가서 사회생물학 분야를 창시한 에드워드 윌슨 교수님의 제자가 되어 박사를 했다.


서울대로 돌아오다


석사는 3년, 박사는 8년이 걸렸다. 상당한 시간을 산으로 강으로 다니며 살아서, 공부하고 있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11년을 공부하면서 한 번도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 힘들어 죽겠다는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냥 재밌어서 하다 보니 좀 오래 걸렸을 뿐이다. 한국에 들어오지 않으려고 했다. 당시에 하버드대학교 생물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첫 한국인이었다. 교수님들마다 '네가 하는 공부는 대한민국에서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꾹꾹 심어주었다. 그래서 한국으로 올 생각을 정말 접었다. 미국에 정착하려고 공부만 한 게 아니라 사회생활도 열심히 했다. 보통 7년에서 8년은 걸려야 교수가 되는데, 2년만에 미시간대학교에서 교수를 하게 됐다. 전공 분야에서는 하버드대보다 낫다고 뻐기는 대학교였다. 미시간대학교의 교수가 됐다는 것은 일단 그 수준에서는 기가 막히게 성공했다는 이야기다. 평소 친하던 친구들은 '너는 동양인 쿼터로 들어간 거다', '네가 우리보다 잘나서 거기 교수가 된 게 아니다' 하는 메일이나 팩스를 보내 왔다. 이런 시기와 질투가 전해지면서 이 나라에서 '이방인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서울대학교에서 오라고 했다. 당시 한 학기만, 한 학기만 하면서 고사하다가 일 년 반만에 서울대학교 총장님 전화를 받고 고꾸라져서 한국에 들어왔다. 지금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오라는 바람에, 또 여기로 옮겨 오늘에 이르렀다.


제인구달연구소, 또는 생명다양성재단


김대중 대통령 앞으로 편지 형식의 시론을 썼다. 동강댐 건설을 하지 말자는 내용이었다. 놀랍게도 김대중 대통령이 글을 읽고, 동강댐 건설 전면 백지화를 결정하는 놀라운 사건이 벌어졌다. 갑자기 환경운동하는 분들 앞에 혜성처럼 나타난 스타가 됐다. 졸지에 동양 최대 규모의 환경단체 환경운동연합의 공동대표로 등록하고, 4대강 개발 반대 선봉에 섰다. 온갖 수난을 다 겪었다. 그 과정에서 제인 구달 박사를 만났다. 제인 구달 박사가 2~3년에 한 번씩 한국에 와 주는 건, '제인구달연구소' 지부를 우리나라에 만들라는 의미였다. 한국은 전체적인 사회 분위기가 외국 지부를 돕는 데 회의적이었다. 우리 것도 아닌데 남의 나라 것을 왜 우리가 해 주냐는 분위기였다.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이 그러면 단체를 먼저 만들고 그 단체를 제인구달연구소의 지부로 역할하게 하자는 거였다. '생명다양성재단'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패착이었다. 이 재단을 어떻게 운영할지를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한국에서 개인 자격으로 공익재단을 운영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후원금이 들어와야 직원들 월급이라도 줄 텐데, 다른 사람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말 싫었지만 기업인에게 부탁도 해 봤는데 대한민국의 모든 기업은 자체 재단이 있었다. 기업이 우리 재단에 후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기업의 재단이 발주하는 용역을 하나 얻는 게 거의 끝이었다. 재단 운영이 어려워지던 중에 누가 말도 안 되는 조언을 했다. 유튜브를 해서 돈을 벌어 재단을 운영하라는 것이었다. 그때 아이고 참 별소리를 다 한다고 하면서도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으니 일단 시작했다. 사실 유튜브에서 받는 돈은 몇 푼 안 된다. 그런데 구독자 분들 중에 저 사람이 왜 저런 일을 하는지를 파악한 분들이 많았다. 그분들이 십시일반 재단에 후원해 준 것들이 모여서 제법 큰 돈이 됐다. 이제는 재단이 굶지 않는 수준까지 왔다. 너무 고맙다.


코로나 시대, '최스트라다무스'의 등장


2021년에 '코로나19 일상회복 지원위원회'의 공동위원장을 맡았다. 바이러스 연구하는 사람도 아니고 감염내과 의사도 아니다. 다만, 1980년대 기생충학의 르네상스 시기에 공부를 했다. 이전까지의 기생충학과 이후의 기생충학은 차원이 다르다. 1980년대 전에는 기생충이 숙주를 죽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플라스모디움이라는 기생충은 말라리아를 일으켜 수없이 많은 사람을 죽였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지 아무도 설명을 못하다가 1980년대 초부터 '공진화'라는 개념이 확고하게 들어서게 되었다. 진화라는 게 혼자 독립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주변의 다른 생물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진화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도 인간과 공진화를 한 결과이다. 그런 것을 1980년대 초에 일찌감치 공부했다. 2020년 1월부터 신문에 칼럼으로 쓰기 시작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하고,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 거라고 줄기차게 얘기했다. 당시 생긴 별명이 '최스트라다무스'다. 그래서 일상회복 지원위원회 공동위원장 자리까지 불려간 것 같다. 갈매기 기생충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했던 게 도움이 되었다.


뉴노멀(New Normal)을 넘어 업노멀(Up Normal)로, 더 나은 일상을 향해


학자의 입장에서 온갖 데이터들을 다 들여다보면, 지금은 명백한 기후 위기 상황이다. 일반인들은 데이터보다는 날씨의 변화로 느낄 것이다. 이제 느낌에서 끝나지 말고 머리로 인식하고 가슴을 움직여 행동으로 이어져야 할 때다. 지금 우리 사회가 기후 위기를 인식하기는 했지만, 얼마나 심각하고 그래서 우리가 뭘 해야 하는지까지는 아직 못 간 것 같다. 그걸 어떻게든 해 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코로나가 도움이 좀 되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거 우리가 자연한테 너무 막 하다가 우리가 되돌려 받는 건 아닌가' 하는 과학적이지도 않고 근거도 없어 보이는 이야기들이 굉장히 많이 퍼졌다. 현재 그걸 이어가지 못한 게 너무나 아쉽다. 우리 시민의식이 시민행동 단계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는데 그걸 놓쳤다. 코로나19 일상회복 지원위원회 공동위원장도 사실 그래서 맡았다. 코로나 사태가 끝나면 우리는 어떤 일상으로 돌아갈 것인가를 담당하는 위원회였다. 코로나 때, 남에게 피해를 줄까 마스크를 벗지 않는 시민들의 모습을 보며, 이 어려움을 겪고 벗어나면 우리 사회가 남을 의식하고 배려하는 세상으로 이어지게 하고 싶었다. 진짜 괜찮은 일상, 뉴노멀(New Normal)을 넘어선 업노멀(Up Normal), 더 나은 일상, 더 개선된 일상으로 만들고 싶었다. 이 일은 정권 교체와 맞물려 사표를 내고 두부 자르듯이 끝나버렸다. 인생에서 가장 아쉬운 순간으로 남을 것 같다.

 

다윈 지능에서 다윈의 사도들로, 무엇으로 남을 것인가


『열대예찬』이라는 책이 있다. 『현대문학』 잡지에 1년 동안 매달 연재했던 글들을 묶은 책이다. 현대문학 시상식에 갔는데, 박완서 작가님이 와서 글을 매달 기다린다고 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김훈 작가님도 글을 본다고 했다. 글쟁이들이 연재 글을 읽는다니까, 진짜 겁이 났다. 정말 열심히 썼다. 고치고 또 고쳐서 쓴 글을 모았다. 정말 열정을 다해 엮었는데, 책은 잘 안 팔렸다. 아픈 손가락이다. 다음으로 기억에 남는 책은 『다윈 지능』과 『다윈의 사도들』이다. 『다윈 지능』은 아무래도 전공 분야인 진화에 대한 글이고, 비교적 쉽게 표현해 놓은 책이다. 이 주제의 입문자에게는 좋은 책이라고 자부한다. 『다윈의 사도들』은 당대 최고의 다윈주의자들을 만나 대담한 내용을 엮었다. 『다윈 지능』을 읽고 난 다음에 이 책을 읽으면, 한 단계 업그레이드한 느낌을 받을 거다. 이 두 권이 대표작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이제는 삶을 약간 정리하고, 진짜 하고 싶은 일이 뭐 없을까를 좀 찾아야 하는 데, 자꾸 찌르는 데가 많아서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아마 모르기는 몰라도 못하지 않을까 싶다. 아마 계속 글도 쓰고 강연도 하고 기후 얘기도 하고 생물다양성 얘기도 하고 그러면서 지낼 것 같다. 또 꼬마 때부터 작가가 되고 싶었는데, 이제 이런 얘기 그만 하고 소설이나 시를 쓰고 싶은 마음도 있다. 대학교 4학년 때처럼 어디론가 잠적해야 하는 데, 이게 가능할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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