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혁주 디자이너는 환경 문제 해결을 위해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고, 물건을 고쳐 오래 쓰는 삶을 실천하며 사 디자인을 통해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작지만 큰 변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2025-01-24 최민욱 기자

제품을 디자인하고 생산할 때, 플라스틱을 쓰지 않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낮은 단가, 편리한 소재 특성 때문이다. 황혁주 디자이너는 “어쩔 수 없는 것”으로만 치부하지 않는다. 망가진 물건을 직접 고치고, 오래 쓸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조금 덜 사고, 더 오래 쓰고, 가능한 것은 고쳐 쓰는 삶. 쉬워보이지만 결코 쉽지 않은 변화를 만들어가며 플라스틱 없는 삶을 살아가는 황혁주 디자이너를 만났다.
쌓여가는 플라스틱 쓰레기를 보면서 스트레스도 함께 쌓여
디자인이 끝나면 결과물은 제품이든 광고물이든 대부분 석유화학 계열의 필름이나 원단에 인쇄되어 나간다. 매장에서 쓰는 진열대나 각종 홍보물도 결국 플라스틱으로 완성된다. 어느 날 디자이너인 내가 만들어 내는 것들이 엄청난 탄소 배출을 일으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디자인 자체는 의미 있고 필요한 일이지만, 환경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스트레스가 컸다.
이전에도 녹색연합 사무실을 찾아가거나, 환경 관련 책과 정보는 이전부터 꾸준히 접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직접 행동해야겠다’는 마음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매주 금요일 퇴근길에 회사 앞마당에 컨테이너 가득 쌓인 플라스틱 쓰레기를 보게 되었다. 완성된 작업물들이 그대로 버려져 산처럼 늘어나는 모습을 보면서, 스트레스도 함께 쌓여 갔다.

어렸을 때 살던 동네가 산 중턱에 있는 마을이었다. 하교하면 모두 가방을 집에 던져놓고 산속으로 뛰쳐 들어갔었다. 자기 집 마당만 벗어나면 바로 산속이었으니 멀리 나간 것도 아니다. 그렇게 들어간 산 속에는 자신만의 나무가 있었다. 나만이 올라탈 수 있는 나무였다. 자연속에서 놀고 쉬고 지냈던 경험이 환경에 대한 관심으로 자라난것 같다. 자연에서 뛰놀던 어릴 적 기억과 지금 하는 일이 너무나 ‘극과 극’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돈 벌어야지’라는 생각으로 외면했다. ‘난 그냥 직장인이니까, 디자인에만 집중하면 되지 않나’ 싶었다.
최소한 플라스틱·아크릴·ABS 수지·포맥스 같은 자재로 된 진열대만큼은 만들지 말자
1998년 부천 판타스틱 영화제에서 봤던 환경·동물권·비건 관련 영화의 감상이 계속 남아 있었던것 같다.
디자인 작업을 하나의 작품이라 생각하며 가치 있게 여겼데 ‘이렇게 많은 폐기물을 배출하면서 디자인만 고집할 순 없다. 내가 만든 만큼은 다른 방식으로라도 환경에 도움이 돼야 하지 않나’라는 의문이 강하게 들었다.
어느 날부턴가 더 이상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 무렵, 2016년에서 2018년 사이에 시사매거진 2580 같은 방송프로그램을 보게 됐다. 국내에서 나온 플라스틱 쓰레기가 동남아시아 등으로 수출된다는 내용이었다. 선진국이 약소국에 폐기물을 떠넘긴다는 사실에 놀랬고, ‘이 일은 그만둬야겠다’고 결심에 이르렀다. 시간이 흐를수록 쌓여 있던 고민이 터져버린 것이다. 2018년부터 최소한 플라스틱·아크릴·ABS 수지·포맥스 같은 자재로 된 진열대만큼은 만들지 말자고 마음먹었다. 한동안 편집 인쇄만으로 생계를 이어가려 했다. 하지만 창업 후 당장 일감이 적고 생활이 어려워 다시 일부 플라스틱 결과물 제작을 맡게 됐다. 자괴감도 컸지만, 전업을 완전히 포기하기 어려워 차라리 키보드 수리나 전자폐기물 줄이기 같은 활동을 병행해 ‘조금이라도 오래 쓰게 하자’는 데 집중하게 됐다.
안 쓰고 살 수 없다면, 쉽게 버리지 말자
플라스틱을 완전히 안 쓰고 살긴 현실적으로 어렵다. 플라스틱은 싸고 가볍고 다양하게 쓸 수 있다. 그렇다면 핵심은 “이미 만들어진 물건을 어떻게 오래 쓰고, 쉽게 버려지지 않게 할까?”라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조리도구만 봐도, 플라스틱으로 된 도구는 가볍고 편리해서 다른 소재로 대체하기 힘든 면이 있다. 금속 조리도구로 바꾼다 해도, 뜨거운 열에 노출될 땐 화상의 위험이 있고, 나무로 된 건 쓰다 보면 마모되거나 물에 젖어 손상이 쉽게 일어난다. 결국 전부 다 금속이나 나무만으로 쓸 수도 없고, 완전히 플라스틱을 배제하기도 어렵다.
어쩔 수 없이 플라스틱을 쓴다면, 그만큼 오래 쓰고 고장 나면 고쳐 쓰자’는 식으로 보게 됐다. 물건을 새로 사지 않고 계속 관리해 쓰면, 자연스럽게 시장도 바뀌거니까. 소비자가 이런 방향으로 움직이면 기업들도 다른 마케팅 전략을 짜고, 새로운 상품을 개발하게 될 것이다. 꼭 ‘하나 사서 평생 써라’는 극단적인 얘기가 아니라, 최소한 ‘내가 산 물건은 책임지고 관리하자’는 뜻이다.
어릴 때 프라모델 조립이나 간단한 접착·개조를 해 본 사람이라면 플라스틱 물건들을 직접 고쳐 쓸 수 있다. 예를 들어 문손잡이가 부러지거나 플라스틱 용기가 깨져도, 부품을 갈아 끼우거나 접착해서 다시 사용할 수 있다. 이런 사소한 수리가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화학 물질이 나오지 않고 오래 쓸 수 있는 제품으로 바꾸기 시작해
결혼하고 보니 요리를 많이 하게 되었다. 영화 <다크 워터스>에서 듀폰 코팅 물질이 프라이팬에 사용되고, 이로 인해 유해 물질이 나올 수 있다는 이야기를 접했다. 결혼 후 가족과 생활하게 되면서 가장 먼저 바꾼 건 ‘코팅 팬’을 쓰지 않는 일이었다. 정확히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도 걸렸고, 우리가 무심코 계속 써온 게 잘못이라 느껴졌다. 전통적으로 써오던 무쇠 팬이나 스테인리스 팬처럼 화학 물질이 나오지 않고 오래 쓸 수 있는, 내구성이 확인된 제품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대단하지 않아도 일상에서 가능한 작은 습관부터 변화시켜야
분리수거를 열심히 한다거나 비닐 대신 에코백 사용 같은 기본적인 실천은 꾸준히 하고 있다. 에코백의 실제 효과가 크지 않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면서 조금 회의가 들었다. 텀블러 역시 마찬가지였다. 환경 보호를 위해 쓰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면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홍보되고 판매되는 굿즈 중 하나가 텀블러다. 결국 텀블러 하나를 평생 써야 도움이 된다. 환경을 위한 실천이 재평가되면서 기존에 믿고 실천했던 것들이 뒤집히기도 해서 혼란스러울 때도 있다. 2010년대 들어 전 세계적으로 환경에 관한 관심이 커지면서 연구도 늘어났고, 에코백이나 텀블러 사례도 재논의되고 있으니 혼란이 있다. 결론은 특별히 나의 작은 실천이 대단한 공헌을 하지 못하더라도, 일상에서 가능한 작은 습관과 꾸준한 변화를 이어가는 게 중요하다.
우리에게는 불편함이 스며들 시간이 필요하다
사실 내 가족부터도 환경 문제에 크게 관심을 갖고 있진 않다. 분리수거도 귀찮아 하는 편이라, 자연스레 ‘아빠가 하는 일’처럼 자리 잡았달까. 바쁜 날이면 어느새 쓰레기가 두세 배로 쌓여 있고, 어쩔 수 없이 몇 번씩 나르며 정리해야 할 때도 많다.
그렇다고 가족에게 ‘왜 안 하느냐’고 강하게 요구하면 갈등이 생길 게 뻔했다. 주변을 봐도 환경 문제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의 차이가 확연히 보인다. 나 역시 처음에는 답답했지만, 이제는 강요보다는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만들까’를 고민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분리수거를 상대적으로 잘하는 국가라고 하지만, ‘귀찮게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느냐’라는 시선도 여전하고, 실제로 분리수거된 이후 처리 과정이 제대로 이뤄지느냐는 문제도 남아 있다. 개개인한테 “꼭 이렇게 하세요”라고 일일이 말하기보다는, TV 뉴스나 다양한 캠페인을 통해 점진적으로 문화를 만들어 가는 게 더 효과적이라 생각한다. 분리수거를 하고 쓰레기를 덜 만드는 생활 양식이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러운 습관이 될 수 있게 말이다.
스스로도 ‘가끔 분리수거를 못 하고 넘길 때가 있다면, 그건 그거대로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조금은 내려놓으려 한다. 너무 엄격하게 굴면 스트레스만 더 커지니까. 오히려 각자 할 수 있는 선에서 꾸준히 실천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더 많은 사람이 자연스럽게 참여하게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인터뷰를 마치며
2016~2018년, 국내 플라스틱 쓰레기가 동남아 등 제3국으로 보내진다는 뉴스를 접하고 “이대로 안 되겠다”는 결심을 한 황혁주 디자이너. 본업인 디자인으로 생계를 이어가면서도, 일상에서 물건을 오래 쓰고, 가능하면 고쳐 쓰며 주변인들과 함께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그가 전하는 핵심 메시지는 단순하다. “모든 플라스틱을 일거에 없애긴 힘들어도, 조금씩 덜어 내고, 그나마 존재하는 물건은 최대한 오래 써보자.” 이 작은 행동들이 결국 더 많은 사람에게 퍼질 때, 우리가 마주한 플라스틱 위기도 더디지만 해소할 실마리가 잡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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