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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 계통망 없는 에너지 전환은 전환이 아니다

2025-04-15 이담인 기자

 

재생에너지 설비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지만 정작 전기를 실시간으로 보낼 계통망이 부족해 전기가 낭비되고 있다. 기존의 단방향·수도권 중심 계통망은 지역 간 불균형과 사회적 갈등을 초래하며, 유연하지 못한 전력망 구조는 신기술의 확산도 가로막고 있다. 전기는 '흐름'이다. 대대적인 계통망 혁신이 없다면 전기도, 에너지 전환도 흐를 수 없다.


계통망 없는 에너지 전환의 모순


대한민국의 에너지 전환 정책은 탄소중립이라는 거대한 패러다임 전환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실상은 '발전은 되지만 전기는 흐르지 않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기후위기 시대, 더 많은 재생에너지 설비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것을 실시간으로 수용하고 송전할 수 있는 '계통망'이다. 지금 우리는 '계통망 없는 에너지 전환'이라는 구조적 모순 앞에 서 있다.


계통이 멈추면 전력도 멈춘다


'계통망'이란 발전-송전-배전-수요를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전력공급의 전체 시스템이다. 전력 수요와 공급을 실시간으로 조절하고, 이상 상황에 대비해 전력을 안정적으로 흐르게 하는 제어·운영 기능까지 포함한다. 반면 '그리드(grid)'는 좁은 의미에서 송전선, 변전소, 배전선 등 물리적 전력망을 의미한다. 기술적 설비에 초점을 맞춘 개념이다. 쉽게 말해 그리드가 도로라면, 계통망은 도로를 포함해 신호등, 횡단보도 등 교통의 흐름을 총체적으로 아우르는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전력계통도. 사진 한국전력공사
전력계통도. 사진 한국전력공사

최근 재생에너지 비중이 증가하면서 그리드가 언급되는 일이 많지만, 실제로는 계통망의 운영과 설계가 핵심 변수다. 전기는 우리가 사용하는 순간 바로 만들어져야 하는 특성을 가진 에너지다. 미리 저장해 두었다 필요할 때 꺼내 쓰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발전소에서 생산된 전기를 실시간으로 수요지까지 안정적으로 보내는 체계가 필요하다. 이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바로 계통망이다. 최근 재생에너지 비중이 늘어남에 따라 계통망의 정밀성과 복원력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재생에너지는 시간대별 변동성이 크고, 소규모로 분산되어 설치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측이 어렵고 간헐적인 발전원을 다루기 위해서는 스마트하고 유연한 계통망 운영이 필요하다.


부족한 계통망 때문에 재생에너지 낭비하는 '출력제한'


현재 한국 계통망의 가장 근본적인 한계는 ‘단방향 흐름’이라는 고정관념에 갇혀 있다는 점이다. 산업화 시절 설계된 전력망은 전남 영광의 원자력발전소나 충남 당진의 석탄화력발전소처럼 수도권 외곽의 대규모 발전소에서 생산된 전력을 수도권과 대도시로 보내는 구조에 최적화되어 있다. 이는 에너지 효율과 공급 안정성이 최우선이던 시기에는 타당한 방식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은 전국 각지에서 태양광, 풍력, 바이오매스 등 다양한 재생에너지원이 분산적으로 생산되고 있어 과거의 일방향 전력 흐름 구조로는 새로운 에너지 체계를 효과적으로 수용하기 어렵다. 특히 지역 내에서 재생에너지를 자립적으로 소비하는 것이 매우 힘들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된다.

현 정부의 재생에너지 정책은 주로 발전설비의 ‘설비 용량’ 확대에 집중되어 있다. 몇 기가와트의 풍력·태양광이 신규 설치되었는지를 기준으로 성과를 판단하지만, 실제로 이들 설비에서 생산된 전기가 계통에 연결되어 활용되고 있는지에 대한 점검은 이뤄지지 않는다. 그 결과 출력제한(Curtailment) 현상이 자주 발생한다. 출력제한은 전기를 생산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통망이 부족해 의도적으로 발전을 중단하거나 출력을 낮추는 상황을 일컫는 말이다.

재생에너지는 자연 조건에 따라 생산량이 달라 예측이 까다롭고, 출력도 수시로 변동된다. 예컨대 햇빛이 강하거나 바람이 세차게 불면 순간적으로 전력이 과잉 생산되는데, 이를 전력망이 받아줄 수 없을 경우 출력을 줄이거나 멈출 수밖에 없다. 실제로 제주도에서는 2023년 한 해 동안에만 181건의 출력제한이 발생했다. 재생에너지 발전량이 계통 수용 능력을 초과해 버려지는, 매우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전라남도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재생에너지 생산지이지만, 전남에서 생산된 전기는 수도권으로 흘러가지 못한다. 수도권과 전남을 잇는 송전선로가 단 두 줄에 불과해 송전 용량이 턱없이 부족하다. 친환경적으로 생산된 전기가 낭비되고 있으며, 발전설비가 늘어도 계통망이 따라가지 못해 ‘전기 고립지대’가 확산되고 있다. 재생에너지 발전사업자들이 계통 접속을 위해 수년을 기다려야 하며, 일부는 결국 사업을 포기하는 상황에 이르기도 한다.


심화되는 지역 간 에너지 불균형


현재 전국적으로 약 34기가와트(GW)에 달하는 재생에너지 설비가 계통망 연결을 기다리며 가동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설치는 완료됐지만, 한전이 계통 접속을 제공하지 못해 전기를 생산할 수 없는 상황이다. 불균형은 지역 간 에너지 자급률에서도 드러난다. 광주의 에너지 자급률은 9.3%에 불과한 반면, 전남은 198.9%에 달한다. 에너지 생산이 한쪽에 치우쳐 있고, 이를 효율적으로 분산하거나 저장할 수 있는 기반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계통망 설계가 수도권 중심으로 고착되어 있다 보니 호남 지역에서 생산된 태양광 전기의 상당 부분은 결국 계통에 연결되지 못한 채 폐기된다. 에너지 전문가들은 재생에너지를 얼마나 설치하느냐보다, 생산된 전기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분배할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계통망 부족으로 인한 에너지 낭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는 발전지 인근에 대규모 전력 소비 시설을 함께 조성하는 방식이 거론된다. 데이터센터, 해수담수화 설비, 수소 생산 기지 등이 그 예다. 에너지저장장치(ESS), 무효전력 보상장치, 그리드 최적화 기술 등 이미 입증된 기술도 존재하며, 약 7조 원을 투자할 경우 호남 지역의 출력제한 문제를 상당 부분 해소할 수 있다는 연구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기술적·분산형 대안보다는 대규모 송전망 건설에 집중하고 있다. 정부는 2036년까지 총 56조 5천억 원을 송전망 구축에 투입할 계획이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한전이 계통망 설계와 운영을 독점하는 구조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지적하며, 이 예산 중 일부만이라도 지역 단위의 전력 안정화 설비에 우선 투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연하지 못한 계통망의 한계


유연하지 못한 계통망 또한 해결해야 할 문제점이다. 계통망이 유연하지 않다는 것은 곧 ‘전기 흐름을 실시간으로 조절할 수 없다'는 뜻이다. 현대의 전력 시스템은 더 이상 공급자 중심의 일방향 구조로 설명되지 않는다. 사방에서 만들어져 사방으로 흘러가는 추세다. 수요 또한 변화하고 있다. 분산형 자가 소비, 수요 반응 자원(디맨드 리스폰스) 등 다양한 형태의 참여형 수요처가 등장하고 있지만, 현재 우리 전력망은 기본적으로 ‘예측 가능한 고정 출력’을 전제로 짜여져 있어 이 유동적 발전원에 근본적으로 부적합하다. 무엇보다 ESS나 전기차처럼 유연한 계통망 없이는 제 역할을 할 수 없는 새로운 시스템들이 빠르게 발전 중이다. 계통망이 스마트해지지 않으면 최첨단 기술도 제 기능을 발휘하기 어렵다.


지역 갈등을 부추기는 소비지 중심 계통망


소비지 중심의 계통망 설계가 지역 불균형을 고착화하고 있다. 전력 생산을 위한 발전소는 지방과 비수도권에 집중돼 있으나, 소비는 서울·경기 등 수도권에 쏠려 있다. 이로 인해 막대한 양의 전력이 장거리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송전 손실, 송전선 과부하, 전력 수급 불안정이라는 문제를 야기한다. 고압 송전선을 건설할 때 발생하는 환경 문제와 지역주민 갈등으로 치르는 사회비용 또한 만만찮다.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시위. 사진 환경운동연합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시위. 사진 환경운동연합

대표적인 갈등 사례가 바로 ‘밀양 송전탑 사태’다. 2010년대 초, 경북 울진의 신한울 원전에서 수도권으로 전력을 보내기 위해 한전은 경남 밀양 등 5개 지역에 765kV 초고압 송전선로를 계획했다. 그러나 이 노선이 주거지, 농지, 산지를 관통하면서 지역 주민들의 극심한 반발에 부딪혔다. 주민들은 건강권 침해, 재산권 훼손, 환경 파괴 등을 이유로 송전탑 건설을 막았고, 공사 강행 과정에서 경찰과 충돌하고 사망자가 발생하는 등 전국적인 사회 갈등으로 비화됐다. ‘전기는 수도권이 쓰고, 고통은 지역이 짊어진다’는 계통망 문제의 근본 모순을 드러낸 사건이다. 

제주도는 지리적 특성으로 태양광과 풍력 발전이 급속히 확대됐음에도 정작 이를 육지로 보낼 계통망이 없어 수도권이 전기를 낭비한다는 인식이 팽배해졌다.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는 “왜 전기를 못 쓰게 하느냐”, “기껏 땅을 내줬는데 전기는 버린다”는 불만이 커지고 있다. 계통망 확충 없이 무리하게 재생에너지를 늘릴 경우 지역 수용성을 해치고, 에너지 전환 신뢰도를 떨어뜨릴 수 있다.


계통망 설치보다 '선제적 계통 계획'이 우선되어야


2023년 발표된 제10차 장기 송변전설비계획은 계통망 관련 문제에 대한 부분적인 해법을 제시한다. 재생에너지 변동성 대응을 위한 ESS와 FACTS, 동기조상기 등 계통안정화 설비 확대, 서해안-수도권 HVDC 구축, 시나리오 기반 설비계획 등은 진전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핵심은 '선제적 계통 계획 수립'과 '정책 연동성 확보'다. 발전 허가와 계통 접속이 시간차를 두고 따로 진행되면 계통 병목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선제적 계통 계획 수립은 곧 '계통망 건설의 순서를 바꾸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발전소가 먼저 세워지고, 그 뒤에 계통망이 따라붙는 방식이었다. 재생에너지 발전소는 설치에 2~3년밖에 걸리지 않는 반면, 송전망 건설은 인허가와 주민 수용성 확보, 공사까지 최소 10년이 소요된다. 결과적으로 발전소는 완공됐는데도 계통망이 연결되지 않아 몇 년 씩이나 전기가 낭비된다. 발전소보다 먼저, 혹은 동시에 계통망을 설계하고 착공할 수 있는 ‘선제적 계통 계획’ 체계가 반드시 필요하다.

‘계통 영향 평가’ 제도 도입도 주요한 전환점이다. 현재는 발전사업자가 허가를 받은 후에야 계통망 연결을 신청할 수 있어 이미 포화된 구간에서는 접속 자체가 거부되기도 한다. 앞으로는 발전사업 초기 단계부터 해당 지역의 계통 여유를 검토하고, 이를 바탕으로 입지를 조정하는 구조로 바뀌어야 한다. 이미 정부는 2024년부터 일부 대규모 사업자에게 전력계통영향평가를 의무화할 계획이며, 이를 전면 확대하고 제도화하는 것이 다음 과제로 꼽힌다.

투자 방식의 전환도 필요하다. 현재 한국의 계통망 투자는 한전이 독점하고 있으며, 재무 부담과 절차적 제약으로 인한 속도 저하가 반복되고 있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미국의 ISO(독립 계통운영자) 모델처럼, 송전망 건설에는 민간이 투자하고 운영은 공공기관이 맡는 방식의 ‘역할 분리형 구조’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정부가 민간 투자자의 참여를 유도할 수 있는 법적 기반과 책임 분담 구조를 마련해야 할 시점이다.


에너지 전환의 마지막 퍼즐, 사회적 합의


또 하나의 과제는 지역 전력망의 구조 개편이다. 수도권 중심의 단방향 계통망을 양방향 흐름이 가능한 분산형 계통망, 즉 ‘마이크로 그리드’와 같은 구조로 대체해야 한다. 특히 지역정부 주도의 에너지 계획과 연계해 각 지역의 자립성과 에너지 안보를 높이는 방향으로 전력망을 설계하는 노력이 요구된다.

무엇보다 계통망을 둘러싼 갈등을 사회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거버넌스가 중요하다. 송전선로는 지역 주민에게는 피해로 여겨지지만, 국가에게는 필수적인 공공 인프라다. 계통망 확대에 대한 명확한 정보 공개와 공론화 절차를 통해 주민 수용성을 높이고, 공공의 이익을 균형 있게 조율할 수 있는 사회적 대화를 제도화해야 한다. 에너지 전환은 산업 전반의 구조 전환과 직결되는 만큼, 산업부, 환경부, 국토부, 지자체까지 전 부처의 공감대 형성과 협업이 필수적이다. 계통망 계획을 에너지기본계획과 연계해 통합 관리하고, 독립적이고 전문성을 갖춘 계통운영기관의 역할을 강화한다면 더욱 효과적으로 에너지 전환을 이뤄낼 수 있다.


정의로운 에너지 전환은 계통망 혁신으로부터


에너지 전환은 발전원을 친환경적으로 바꾸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탄소중립이라는 시대적 요구 아래 전기의 흐름을 설계하고 조정하는 계통 체계를 새롭게 짜는 일이다. 한국은 재생에너지 확대라는 선언을 넘어 계통 중심의 실행 계획을 수립해 예산, 제도, 인력, 데이터 기반 체계 등을 총체적으로 정비해야만 한다. 정의로운 전환의 핵심은 계통망 체계에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발전 설비만 세우는 시대는 끝났다. 전기는 흘러야 한다. 그래야 진짜 전환이다.

1 Com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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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okim
2일 전

스마트그리드를 넘어 계통망 혁신이 이루어져야 에너지전환이 제대로 완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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