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 국제협력 플랫폼을 활용한 남북 협력
- planetssong03
- 4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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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24 김성희 기자
남과 북은 2000년대 CDM을 통해 기후 협력을 시도했지만 국내 정치 상황 속에서 사업이 중단되었다. CDM 사업의 연속성을 가진 파리협정 제6조는 이 협력 모델을 다시 살릴 수 있는 새로운 제도적 기반이다. 기후위기라는 공동의 위기 앞에서 남북이 다시 연결될 수 있는 현실적인 제도적 접점이 될 수 있다.
남과 북은 2000년대 'CDM(청정개발체제)'으로 기후 협력을 시도한 바 있다. CDM은 교토의정서 하에서 운영된 국제 탄소시장 메커니즘으로, 북은 2000년대 중후반 총 8건의 감축 사업을 국제적으로 등록한 경험이 있다. 이때 구축된 사업 모델과 협력 방식은 파리협정 제6조에서 규정하는 새로운 탄소시장 메커니즘(SDM)의 틀 속에서도 재구성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준다.
기후위기라는 보편적 문제 앞에서 정치적 대립을 넘는 새로운 접촉면을 만드는 것, 그것이 오늘날 기후 외교의 또 다른 이름이자, CDM 이후 우리가 다시 열어야 할 남북 협력의 문일지 모른다. 그 출발점은 공유된 경험이 오류를 줄일 수 있다.
CDM(Clean Development Mechanism, 청정개발체제), 핵심은 '협력'
CDM(Clean Development Mechanism, 청정개발체제)은 1997년 채택된 교토의정서에 따라 설계된 국제 탄소시장 메커니즘이다. 선진국이 개발도상국에서 온실가스 감축 사업을 수행하고, 이를 감축 실적으로 인정받아 자국의 감축목표 달성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한 제도다. 예를 들어, 한국의 기업이나 정부가 개발도상국에 재생에너지 설비를 설치해 온실가스를 줄였다면, 그 감축량은 한국의 공식적인 배출권으로 이전 돼 거래되거나 기록될 수 있다.

핵심은 ‘양자 간 협력’이 감축 실적으로 전환된다는 점이다. 감축 실적은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의 인증 절차를 거쳐 ‘CER(Certified Emission Reduction)’이라는 국제 탄소배출권으로 발급되고, 이를 다른 국가나 기업이 매입할 수 있는 구조다. 이로써 CDM은 단순한 원조나 개발 협력이 아니라 시장 기반의 인센티브 메커니즘으로 작동하게 된다.
CDM은 탄소 감축 비용이 낮은 개도국에서 저비용 고효율의 감축을 가능하게 했고, 동시에 개발도상국은 기술과 자본을 도입해 에너지 시스템을 개선할 수 있었다. 현재 UNFCC공식 통계에 따르면 CDM은 전 세계적으로 7800건이 넘는 프로젝트가 등록되어 있다.
현재 CDM은 2020년 파리협정 체제가 출범하면서 전환의 매커니즘으로 변화되고 있다. 파리협정은 모든 체약국에 자발적 감축의무를 부과하는 구조로 바뀌었고, 이에 따라 CDM은 제6.4조 기반의 지속가능개발 메커니즘(SDM)으로 계승되었다. 현재 SDM은 새로운 감축 방식과 회계 규칙을 마련 중이며, 기존 등록된 CDM 프로젝트와 프로그램은 특정 조건을 충족할 경우, 일부 SDM으로 전환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CDM으로 남북 '기후협력'의 물꼬를 트다
남북 간 CDM 협력 논의는 단순한 기후 정책이 아니라, 정상회담 이후 구축된 대화 채널과 외교적 환경 속에서 시작된 기회였다. 특히 2007년 제2차 남북정상회담과 그 후속 조치들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당시 노무현 정부는 개성공단, 경제 협력 등 기존의 경협 프레임을 넘어, 환경·에너지 분야에서도 실질적 협력 모델을 탐색하고 있었다.
2007년 말, 서울에서 열린 남북 총리회담 중 비공식 실무 접촉을 통해 남북 공동의 CDM 사업이 제안됐다. 이 회담에서 남북 양측은 산림녹화와 병해충 방제, 환경오염 방지 사업을 추진하기로 합의했고, 구체적으로는 △백두산 화산 공동연구사업과 관련된 협력 사업 추진, △황사를 비롯한 대기오염 피해 감소를 위한 평양지역 대기오염 측정 시설 설치 및 자료 교환 진행, △남북 환경보호센터 및 한반도 생물지 사업 추진, △양묘생산 능력 및 조림 능력 강화를 위한 산림녹화 협력 사업 단계적 추진, △산림병해충 피해 방지를 위한 조사와 구제 공동 진행 등에 합의하였다.
그러나 이 협력은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기존의 남북 대화 채널은 사실상 중단되었다. ‘비핵·개방·3000’ 전략으로 대북 기조가 바뀌면서, 기후나 환경 분야의 협력도 정책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2010년 천안함 사건과 5.24 조치 이후 정부 간 협력뿐 아니라 민간 차원의 실무 논의마저 불가능해졌다.

파리협정 체제가 공식화된 이후, 제6조 기반의 새로운 기후 협력 전략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2018년 「9월 평양공동선언」은 남북 기후 협력의 전환점을 울렸다. 산림 협력과 에너지 지원을 주요 의제로 올렸고, 이는 비시장 메커니즘(제6.8조) 기반의 협력 방식으로 전환된다는 흐름을 보여 준다. 하지만 이마저도 정책의 우선순위 변경, 대북 제재 강화 등으로 인해 사실상 중단되었다.
하지만 한국의 법제도는 국외감축 목표 이행을 위한 구체적인 절차를 규정하고 있는 현행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탄소중립·녹색성장기본법」과 동법 시행령(동법 제35조 및 동법 시행령 제32조~제38조)이 1997년 채택된 교토의정서 연장선상의 청정개발체제(CDM)에 머물러 있으며 파리협정 제6.2조에 기반한 유연한 협력 설계가 법적으로 뒷받침되지 않고 있는 현실이다.
결국, 남북의 CDM은 멈췄다. 정치적 신뢰와 실무 채널이 작동하던 시기에는 북한과 국제적 등록사업을 함께 설계할 수 있었지만, 대화의 문이 닫히는 순간 사업도 닫혔다. 지금 필요한 것은 새로운 제도보다, 다시 문을 여는 정치적 선택과 정책적 복원력이다.
북의 CDM 사업 추진 현황
시장 메커니즘에 바탕을 둔 CDM은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상호 이해에 부합하는 제도로서 북이 CDM을 활용할 경우, 기술 이전 가능성이 커질 뿐 아니라 외국자본 유치, 사회간접자본의 확충, 고용창출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현재 북은 1994년 기후변화협약에, 2005년 교토의정서에 가입했으며, 2016년 8월 파리협정에 가입했다. 2015년 기후변화당사국 총회에 참석하여 1990년 대비 온실가스 배출량을 37.4%까지 줄이겠다고 밝혔으며, 자체 정책으로 2030까지 8%의 온실가스 배출량 감축을 공약했다. 한편 만약 자신들이 기대하는 만큼 국제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추가로 32.25%를 감축함으로써 총 40.25%를 감축하겠다는 약속도 제시했다. 특히 산림 복구 정책을 기후변화 대응의 주요 수단으로 강조하고 있으며, 국제사회 환경 협력에 적극성을 보이고 있다.
2008년, 국가환경조정위원회 산하에 CDM 국가승인기구(DNA)를 설치하고, CDM 관리기구에 CDM 사업을 등록하는 등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 내 CDM을 활용해 왔다. 2012년까지 총 8건의 CDM 사업이 국제적으로 등록되었으며, 이 중 대부분은 중소형 수력발전소 건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대표적인 예가 예성강 수력발전소 시리즈이다. 예성강 3호, 4호, 5호 발전소와 더불어 금야, 원산군민 발전소 등이 포함된 이들 프로젝트는 모두 14~20MW급의 중형 수력발전소로 설계되었으며, 체코의 기술 파트너가 협력 기업으로 참여했다. 사업이 정상적으로 가동될 경우, 북한의 전체 수력발전용량 약 10% 수준을 차지할 것으로 예상되는 잠재력을 지닌 것으로 평가되었다. 이는 북한이 국제기후기구와의 기술적 협력 채널을 개방한 사례이기도 하다.

하지만 탄소배출권(CER) 발급 실적은 전무한 실정이다. 북은 총 8건의 CDM 프로젝트를 UNFCCC에 공식 등록했지만, 2025년 현재까지 단 한 건의 CER도 발급받지 못했다. 수력발전소 건설 지연, 운영 차질, MRV(Monitoring, Reporting, Verification) 검증 체계 부재 등이 중첩되며, 모든 등록 사업이 문서상 기록에만 머물러 있는 상태다. 그러나 외부 세계와 철저히 단절된 북한이 CDM이라는 제도적 틀을 통해 국제적 검증과 등록 절차를 수행했다는 점은, 향후에도 투명성과 규칙 기반 협력이 가능한 플랫폼을 통해 기후협력을 추진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남북 동시에 국제 탄소 감축 이니셔티브에 기여할 수 있어
파리협정 제6조는 온실가스 감축을 둘러싼 국제사회의 협력 방식을 새롭게 정의한 조항이다. 이 조항은 국가 간 자발적 협력을 통해 감축 실적을 상호 이전하거나, 기술·재정 등 비시장적 수단을 통해 기후 대응 역량을 강화하도록 하고 있다. 특히 제6.2조는 국가 간 직접 협정을 통해 감축성과(ITMO)를 주고받을 수 있도록 허용하여 자율성과 유연성을 극대화한 반면, 제6.4조는 UN이 지정한 감독기구의 승인 아래 감축사업을 등록하고 배출권을 발급받는 방식으로, 기존 교토의정서 하의 청정개발체제(CDM)를 계승한 ‘신CDM’이라 불린다.
CDM은 과거 선진국이 개도국에서 감축사업을 진행하고, 해당 실적을 자국 감축 목표 달성에 활용하는 방식으로 작동했지만, 일방성, 이중계산, 환경기준 미흡 등의 한계로 비판을 받았다. 이를 보완한 제6.4조는 엄격한 투명성과 환경 건전성을 전제로 하나, 북한과 같은 제재 대상국에는 진입 장벽이 높다. 반면, 제6.2조는 정해진 규범보다는 양자 합의에 기반한 ‘정치적으로 덜 민감한’ 협력이 가능해 남북 간 기후 협력의 실질적 가능성을 열어 준다.

실제로 한국은 2030년까지 온실가스 감축 목표의 11.5%를 국외에서 달성하겠다고 UN에 공표한 유일한 나라로, 해외 협력 파트너가 절실하다. 북은 산업화 수준이 낮아 탄소 감축의 잠재력이 크고, 저비용으로 실적을 창출할 수 있는 이상적인 협력 대상이다. 철도 전력화, 산림녹화, 재생에너지 설비 지원 등은 모두 감축사업으로 등록 가능한 항목이며, 한국의 국가감축목표(NDC)에 반영될 수 있다. 특히 산림 분야는 북한이 이미 UN에 공식 제출한 NDC에서 강조한 내용으로, REDD+ 사업과 연계할 경우 남북이 동시에 국제 감축 이니셔티브에 기여하는 모델이 된다. 하지만 북이 독자적으로 제6조의 시장 메커니즘에 참여하긴 쉽지 않다. 따라서 협력 초반에는 기술 이전, 공적개발원조(ODA), 역량 강화 등 비시장 메커니즘(6.8조)을 적극 활용해야 하며, 장기적으로는 시장 기반 협력으로 전환해 나가는 단계적 전략이 필요하다. 한반도 정세가 정치·군사적 긴장에 갇혀 있는 지금, 탄소배출권이라는 이름의 새 외교 공간에서, 평화와 공존의 씨앗이 움틀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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