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김형민 칼럼니스트 | 잃은 것은 나무만이 아니다
- hpiri2
- 1일 전
- 6분 분량
2025-04-01 김형민

김형민
1970년 서울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자랐다. 1988년 고려대학교 사학과에 입학, 졸업한 후 방송 PD로 30년을 근무하고 퇴직했다. 본명보다 필명 ‘산하’로 알려져 있기도 하며, <시사IN> 칼럼 ‘딸에게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를 연재하는 등 여러 매체에 칼럼을 썼다. 『세계사에 균열을 낸 결정적 사건들』 『한국사를 바꾼 협상의 달인들』 『세상을 뒤흔든 50가지 범죄사건』 『사랑도 발명이 되나요?』 『역사를 만든 최고의 짝』 『딸에게 들려주는 한국사 인물전 1, 2』 『딸에게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 1, 2』 등의 저서가 있다.
부산 용두산 대화재로 사라진, 조선 역대 왕들의 초상
그리스 신화 속 프로메테우스가 자신의 자유와 간(肝)을 걸고 인간에게 불을 내 준 것처럼, 불은 인간의 문명의 결정적인 조력자였지만 동시에 가장 악랄한 파괴자이기도 했다. ‘화재’가 일단 덮치면 인간의 생명과 재산 모두가 날아간다. 우리 문화재 태반은 임진왜란이건 몽골침략이건 한국전쟁이건 누군가에 의해 일어난 ‘불’에 의해 파괴됐다. 조선 왕조의 역대 왕들의 초상, 즉 어진(御眞)들은 한국전쟁의 포화를 피해 가까스로 부산으로 옮겨졌으나 그 노고도 헛되이 부산에서 일어난 용두산 대화재로 불쏘시개로 변해 버렸다.
그래서 우리가 실제로 온전한 ‘용안’을 뵐 수 있는 왕은 두 명이다. 공교롭게도 조선 왕조 왕들 가운데 여든을 넘겨 살았던 두 사람, 태조 이성계와 영조다. 살아 수명도 길더니 죽은 후 운도 좋은 모양이다. 타다가 겨우 겨우 반쪽 얼굴만 남은 임금도 있다. 바로‘강화도령’ ‘철종’이다. 인생의 반은 평민으로, 반은 임금으로 지냈던 그의 일생을 처연하게 드러내듯이.

문경새재길에 있는 '산불됴심' 비석
송덕비든 공덕비든 기념비든 비석 세우는 데에는 세계 어느 민족에도 뒤지지 않았던 조상들이었지만 한글창제 이후 구한말까지 세워진 비석 가운데 ‘순한글’로 된 비석은 딱 하나밖에 없다. (다른 비석들은 죄다 한문이거나 가물에 콩 나듯 국한문 혼용이다.) 문경새재길 어간에 있는 ‘산불됴심’ 비석이다. 백두대간에서 소백산맥으로 방향을 튼 거대한 산자락 사이의 통로이자 요새였고, 영남에서 서울 올라가는 길 중 가장 번다했으며, 근처에 나라에서 목재로 썼던 황장목의 산지였기에 지나는 사람들에게 ‘산불’의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세워졌다고 추정된다. ‘조심’이 아닌 ‘됴심’으로 표기된 것으로 보아 영정조 시대쯤부터 문경새재를 지켜온 듯하니 200년 전 사람들도 ‘자나깨나’ 산불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산불의 광란, 그 길목에 놓인 문화재들
지난 목요일 미약하게 빗방울이 떨어지던 즈음, 가방에 있던 우산을 꺼내지 않았다. 이 고마운비를 그냥 ‘맞아 드리겠다’는 마음이었다. 산성비든 흙비든 무슨 비라도 내려서 소백산맥 동남쪽의 저 끔찍한 화마를 물리쳐 주십사 하는 바람이었다. 중뿔난 애국자도 아니고 딱히 이타심이 강한 처지도 아니지만, 절로 그런 기도가 나올 만큼 영남 지역 산불은 심각했다. 페이스북 친구가 “서울 사람들은 이 끔찍함을 너무 모르는 것 같다.”고 보내온 동영상은 글자 그대로 하나의 지옥도였다. 사방이 불타 오르고 하늘은 연기로 막히고 땅은 불길로 막히는 위로 불씨들이 무슨 엔진을 단 듯이 펑펑 날아다녔다.
피난하지 못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불을 끄던 이들이 고립되고, 수천 명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서 집과 생활터전이 잿더미가 되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몸뚱이만 빠져 도망쳐야 했던 무지막지한 산불 소식 가운데 또 하나의 근심거리는 산불의 광란 길목에 있던 문화재들의 소실과 위기 소식이었다.
선인(先人)들의 발자취 소실
경북 의성에서 발생한 산불은 안동을 쓸고 영양과 청송으로 번지더니 주왕산을 위협하고 태백산맥을 넘어 영덕까지 손을 뻗쳤다. 경남 산청에서 발생한 화재는 하동과 단성을 휩쓸고 지리산까지 넘보았다. 안동 하회마을이나 병산서원처럼 가까스로 화를 모면한 곳도 있었지만 속절없이 화마의 혓바닥에 휘발려 재가 돼 버린 문화유산도 적지 않다. 산불로 인해 여러 지정·비지정 문화유산, 특히 이동할 수 없는 건축 유산에 대한 피해가 잇따라 발생했다.
국가유산청이 정부 수립 이래 처음으로 ‘국가유산 재난 위기’ 경보를 ‘심각’ 단계로 격상시킬 정도였다. 이번 산불로 잃어버린 생명들의 소중한 무게에 비할 수야 없겠으나, 더 이상 지킬 수 없게 된 역사의 흔적들, 선인(先人)의 발자취 소실이 어찌 안타깝지 않겠는가 서글프지 않겠는가. 그것들이 우리 대(代)에 사라졌다는 현실 앞에서 어떻게 심사가 편안할 수 있겠는가.
외로운 구름, 최치원이 머물렀던 천년고찰 고운사(孤雲寺)
그럼 이 산불의 맹위 앞에 사라진 문화재들, 우리가 잃어버린 옛것들, 옛 사람의 흔적들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우선 천년고찰 고운사(孤雲寺)다. 원효와 더불어 우리나라 절의 반은 창건한 듯한 의상 스님이 지은 이름은 고운사(高雲寺)였다고 한다. 이 ‘높은 구름’의 우아함을 ‘외로운 구름’으로 바꾸게 된 계기는 다름아닌 신라 시대의 명사 최치원이었다.
그의 아버지 최견일은 열 두 살 아들을 당나라로 유학 보내면서 이렇게 얘기한다. "10년 안에 과거급제 못하면 어디 가서 내 아들이라고 하지도 마라. 나도 아들이 있었다고 말하지 않겠다.” 단순히 교육열 높은 한국 사람의 조상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그 말에 한이 서린 느낌이다. 큰아들은 출가해 버리고 장남 같은 둘째 아들을 만리타향으로 보내는 아버지에게는 당나라의 ‘과거(빈공과) 급제’란 골품제로 칭칭 감긴 ‘꼴통 신라’에서 출세의 보증수표 같은 것이었으리라. 하지만 당나라도 막장 신라도 망해 가던 시대였다. 신라로 돌아와 지방관으로서 이런 저런 노력도 해 봤지만 6두품 최치원은 하늘이 알게 올라가 봐야 신라 17관등 중 6두품인 아찬벼슬이 다였다.
최치원은 벼슬을 그만두고 전국 각지를 떠돌게 된다. 부산의 해운대에서 금강산 구룡폭포까지 그 흔적을 남겼던 최치원이 고운사에 머물면서 ‘고운사’는 높은 구름에서 최치원의 호를 따서 외로운 구름으로 그 이름을 바꾸게 된 것이다. 또 최치원은 이곳의 스님들과 함께 가운루와 우화루 등 고운사의 누각들을 세웠다. 여러 차례 중수를 거듭했으나 어차피 목조 건물은 새롭게 갈아끼우고, 나무를 덧댈 수밖에 없는 것. 엄연한 최치원의 자취가 살아 있는 절이었다. 큰 절 특유의 사하촌(寺下村) 같은 것도 없이 고즈넉하고 정갈한, 그 입구에 조성된 소나무 숲 솔향기 그득하던 곳이었다.

오죽 염라대왕이 조선(고려) 사람이 저승에 오면 “고운사를 가 봤는가?” 하는 질문을 했다는 전설이 생겨났겠는가. 이제 우리가 죽어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은 이렇게 물을 지도 모르겠다. “고운사 불타는 것 봤느냐?” 그때 염라대왕에게 “안타깝습니다. 그래도 대웅전과 염라대왕 등 저승 시왕 모신 명부전 등 11개 건물은 살아 남았습니다.”라고 대꾸하면 염라대왕은 뭐라고 할까.
꼬장꼬장한 조선 선비 김방걸을 기렸던, 지산서당
경북 의성을 관향(貫鄕)으로 하는 의성 김씨의 경우 입향조, 즉 의성에 처음 들어온 이의 후손들이 ‘내앞마을’에 정착하고 살아 경북 북부 일대에서는 ‘내앞김씨’라고 불린다. 단일 성씨로는 일제 강점기에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가문이다. 의병을 선도한 김흥락, 남만주의 호랑이라는 별명을 지녔던 김동삼, 가산을 도박과 음주에 탕진한 듯 보였으나 일경의 눈을 피해 독립운동 자금으로 보냈던, 평생 욕을 먹으면서도 그 욕까지 감내했던 저 유명한 ‘파락호’ 독립운동가 김용환 등 무려 106명이 포상을 받았다.
서애 유성룡과 함께 퇴계 이황의 애제자였던 김성일도 의성 김씨인데 그 맏형 김극일의 후손 중 김방걸이라는 이가 있었다. 숙종 때 사람으로 남인에 속하여 서인과 격렬히 맞섰지만 인현왕후를 폐출하는 데는 또한 강하게 반대했고, 이를 저지하지 못하자 왕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지 못했다 자책하며 낙향해 버릴 정도로 꼬장꼬장한 사람이었다. 이 사람을 기리며 후손들이 세웠던 지산서당도 잿더미가 됐다. 이 김방걸의 후손인 김시정(호는 국탄)이 1757년 (조선 영조 33년)에 분가하면서 지은 살림집인 국탄댁도 이번 불길에 희생됐다. 지산서당도, 국탄댁도 다른 곳에 있었으나 임하댐 건설로 인한 수몰을 피해 지금 자리로 옮겨졌다가 물 대신 불을 만나 재로 변하고 말았다.

세종 대왕의 장인, 심온을 위로했던 청송 심씨 묘재각 만세루
높은 자리에 올랐다가 되레 화를 입고 패가망신한 예는 드물지 않으나 조선 시대를 통틀어 가장 높은 위치에서 최악의 나락으로 순식간에 굴러떨어진 예로는 세종 대왕의 장인이었던 심온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기존의 세자를 폐하고 왕이 된 세종의 장인으로서 뭇 사람들의 우러름을 받았던 심온이었다. 그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환송인파가 인산인해였다고 한다.
그런데 바로 이 명망 때문에 심온은 태종의 견제구에 걸려들고 만다. 태종은 억지에 가까운 역모죄를 심온에게 뒤집어씌웠고, 심온이 도대체 누구와 역모를 꾀했는지 대질이라도 시켜 달라 외쳤으나 대질할 수 없었다. 그가 명나라에서 귀국하기도 전에 ‘역당’들을 죽여 버렸으므로. 결국 심온은 처형되고 그 일가도 파국을 맞는다. 세종의 부인이자 심온의 딸인 소헌왕후 폐위 얘기까지 나올 정도로 파장은 컸다.
무고한 아버지의 죽음과 폐위 위협 속에 소헌왕후의 속은 타들어 갔고, 무서운 아버지 태종의 호령 앞에 세종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태종이 죽은 뒤에도 그 처분을 정면으로 뒤집지 못해 심온의 복권은 세종의 아들 문종 대에 이뤄질 정도였다. 하지만 세종은 청송 부사 하담에게 명을 내린다. “청송 심씨 가문의 시조 심홍부의 묘제각을 지어 주라. 비가 오면 그곳에서 제사를 모실 수 있게 하라.” 이렇게 하여 심홍부의 묘 근처 청송 심씨 가문의 원찰 보광사 남쪽 끝에 ‘만세루’(萬歲樓)가 지어진다.
조선 왕조 임금들 가운데 정치력과 권모술수에 가장 뛰어났다고 평가되는 아버지 태종이 자신의 처갓집 가문을 박살내는 모습을 지켜보며 애면글면했던 세종이, 8남 2녀라는 정식 왕후로는 조선 왕조 최다산(最多産) 기록을 자랑할 만큼 금슬이 좋았던 왕비에게 내렸던 말 없는 위로의 흔적이었다. 제삿날 비가 오면 청송 심씨의 후예들은 만세루에 올라 제사를 모시며 세종과 소헌왕후의 공덕을 기렸으리라.


귀주대첩의 공훈자 강민첨이 심었다는, 수령 900년의 두양리 은행나무
나무 중에도 사연 서린 나무, 오래도록 서 있어 사람들의 기억과 입길에 오르내린 나무가 있다. 경남 산청 화재로 사라진 경남 하동군 옥종면 두양리에 있던 수령 900년의 두양리 은행나무도 그중 하나였다. 말이 수령 900년이지 고려 초입부터 21세기까지 그 모든 세월을 지켜본 나무라고 생각하면 그 나무 자체의 역사가 얼마나 어마어마한가. 거기에 우리 역사에서 북방 유목민족의 군대를 수성전(守成戰) 아닌 야전(野戰)으로 대파했던 흔치 않은 예인 귀주대첩의 공훈자 강민첨의 이야기도 끼어 있다면 말이다.
귀주대첩 당시 대장군으로 총사령관 강감찬을 보좌하던 그가 어려서 공부하며 심었다는 나무가 두양리 은행나무였다. 그러나 화마(火魔)는 인간의 역사 따위는 관심을 두지 않아 높이 27미터, 두께 9.3미터의 900년 은행나무를 삼켜 버렸다. 강민첨의 사당이자 영정을 모신 두방재( 斗芳齋)가 가까스로 살아남은 것이 화마가 베푼 한 가닥 온정이었다.
화마에도 살아남은 '숭례문 현판'
수백년, 천년 가까운 세월 사람들의 손길과 발길로 다듬고 정성과 관심으로 지켜 온 문화재들이 화마에 휩쓸린다면, 그래서 영영 볼 수 없게 된다면 그 또한 얼마나 아픈 일일 것인가. 고쳐 쓰고 다시 지어 ‘옛날 그대로’가 아닌 것들도 마찬가지다. 숭례문을 무심히 수천 번은 지났겠으나 어느 광인(狂人)이 낸 불길에 잿더미가 된 모습에 얼마나 속이 쓰렸던가. 그때 탄식했다. “하필 우리 때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이 웬지 모를 죄책감에 몇 번이고 잿더미가 된 남대문 지붕에 눈을 박았던가.
‘숭례문’ 현판은 세로로 걸려 있다. 풍수지리상 불꽃 모양으로 넘실대는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내리누르려는 목적이 있었다. 숭례문 방화 당시 소방대원들은 필사적으로 불을 끄다가 마지막 순간 이 현판을 문루에서 떼냈다. 양녕대군의 글씨로 알려진 기운찬 필체. 사실과는 거리가 멀지언정 관악산의 화기를 막았던 현판은 다시 숭례문에 내걸려 있다. 그렇게라도 역사는 이어지고 옛 사람들의 흔적은 후손들에게 전해진다.

"100년을 바라보며 복원하겠습니다"
이번 영남지역에 펼쳐진 지옥의 산불들의 폐허는 참혹하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산불의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 대책을 살뜰히 챙기고 (개인적으로는 한식 청명 기간 성묘 금지를 촉구하는 바다.) 폐허에서 새로운 싹을 틔우고 자연으로 하여금 복원할 힘을 붇돋는 일일 것이다. 아울러 우리가 잃어버린 문화재들을 복원할 수 있는 것들은 복원하고, 살릴 수 있는 것들은 살려서, 후세에 전하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하리라. “하필 우리 때에”하는 한탄은 뒤로 하고 말이다. 2005년 영동지역 산불로 전소된 낙산사 주지 정년 스님의 호소문 한 자락은 우리도 되뇌야 할 것 같다.
“참화의 업보는 제가 짊어져야 할 짐이기에 허물과 책임을 논하기보다 낙산사 복원을 기도하고 발원하겠습니다. 동참하여 주십시오. 사부대중이 함께 기도하고 함께 복원하므로 잃어버린 영화의 꿈속에 있기보다는100년을 바라보면서 복원하겠습니다.”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이제 그만큼을 복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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