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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효원의 지구와 정치ㅣ파시즘, 노동권, 전쟁의 관계

2025-4-10 윤효원

 

1930년대 세계 정세를 보자. 자유주의적 국제 질서가 무너지고, 미국이 보호무역주의를 주도하며 세계 경제를 위기로 내몰았다. 경제 갈등이 군사 갈등을 부추겼고, 열강들은 군비경쟁에 나섰다. 나치즘-파시즘-군국주의가 세계를 전쟁으로 몰아넣었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식민주의자와 파시스트가 노동을 시장에서 사고파는 상품으로 취급한 결과, 인류가 서로를 살육하는 세계전쟁이 일어났다는 반성이 있었다. 1944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ILO 총회에서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를 헌장에 넣고, 노동권 수호가 세계 평화의 초석임을 선언한다. 2025년 미국이 다시 보호무역주의를 외치고 있다.


윤효원 아시아 노사관계 컨설턴트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감사 |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연구위원

 

국제노동기준을 만드는 국제노동기구(ILO)의 역사에는 노동자 민중의 피와 땀이 잔뜩 묻어 있다. 1919년 10월 미국 워싱턴에서 창립대회를 갖고 출범한 ILO는 1914년에 일어나 1918년 끝난 1차 세계대전과 1917년 11월 일어난 러시아 공산주의 혁명의 결과였다.


ILO 창립과 역사적 배경: 사회정의와 평화의 염원


1919년 봄 프랑스 파리에서 열렸던 파리강화회의는 베르사유 조약을 채택했다. 조약의 13장은 ILO의 역할과 기능을 못 박았다. 1919년 가을 워싱턴 창립대회에서 "사회정의 없이 항구적 평화 없다"는 문구가 ILO 헌장에 박혔다. 전쟁 없는 평화에 대한 염원과 함께 노동자를 위한 정의의 실현을 통해 '산업평화(industrial peace)'를 실현하겠다는 의지가 담겼다.

ILO가 회원국 노사정 3자의 합의로 채택하는 국제노동법인 국제노동기준은 '일의 세계(the world of work)'에서 정의를 실현함으로써 인류가 서로를 살육하는 전쟁의 재발을 막는 동시에, 당시 세계 곳곳을 집어삼킬 듯 거세게 타오르던 공산주의 혁명을 예방하겠다는 의도가 자리했다.

일의 세계에 필요한 사회정의는 일하는 조건을 인간답게 만드는 데서 출발한다는 믿음 속에서 국제노동기구 창립대회가 채택한 1호 협약은 공장에 적용되는 근로시간(hours of work)을 규제하는 것이었다. 1810년대 박애주의 공장주였던 로버트 오언(1771~1858)이 제기했던 하루 8시간이 백 년이 지난 1919년 국제법이라는 형태를 통해 인류 문명의 상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1호 협약은 하루 8시간에 더해 주 48시간을 못 박고 있다.

아직도 대한민국은 조선이 식민지였던 시절 만들어진 1호 협약을 비준하지 못하고 있다. 1919년 ILO창립대회는 하루 8시간 협약을 비롯해 실업자와 여성 보호, 야간근로와 아동노동 규제와 관련하여 6개 협약을 채택하고 폐회했다.


파시즘의 등장과 노동권 말살: 전쟁의 전주곡


1920년대 활활 타올랐던 세계 경제의 호황은 1929년 10월 뉴욕 증권시장이 폭락하면서 막을 내렸다. 1920년대는 극우 정치세력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이기도 했다. 1922년 이탈리아에서 무솔리니(1883~1945)가 주도하는 파시스트 세력이 권력을 잡았다.

1926년 일본에서 히로히토(1901~1989) 천황이 권력을 잡았다. '다이쇼 민주주의'가 막을 내리고 극우세력과 군부의 입김이 커졌다. 민주적 선거를 거쳐 1933년 1월 독일에서는 히틀러(1889~1945)가 이끄는 나치(국민사회주의노동자당)가 권력을 잡았다.

정권을 거머쥔 극우 정치세력의 첫 조치는 노동조합에 대한 공격과 단체교섭의 해체였다. 대신 국가권력의 지원을 받는 노동자 단체가 등장했다. 독일에서는 ‘노동전선(German Labour Front)’이 만들어졌다. 일본에서는 ‘산업보국회’가 조직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노동조합이 해산당하지는 않았으나 국가를 등에 업은 어용단체와 경쟁을 벌여야 했다. 어용단체는 '저녁이 있는 삶(After Work)' 같은 복지 프로그램을 제공하면서 노동자들을 포섭했다.

1929년 가을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위기는 전 세계로 퍼져 나갔고 대공황으로 번졌다. 자유주의적 국제 질서가 붕괴했다. 세계 각국은 보호무역주의와 군비 경쟁으로 치달았다. 1933년 3월 프랭클린 루즈벨트(1882~1945)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뉴딜(New Deal) 정책이 추진되었으나, 이는 미국 국내 사정을 진정시키려는 이기적인 정책이었다. 미국조차 보호무역주의와 자국중심주의를 벗어나지 못했다. 어느 나라도 국제적 수준의 뉴딜을 제안하지 못했고, 국제협력은 붕괴했다.


세계대전의 참화를 끝장낸 미국-소련의 반파시즘 연합


그 결과 인류는 1930년대 내내 전쟁의 소식을 듣게 된다. 1935년 10월 이탈리아가 이디오피아를 침공했다. 1936년 7월 스페인에서는 프랑코 장군(1892~1975)이 이끄는 군대가 인민전선 정부를 전복시켰다. 1937년 7월 일본군이 중국과의 전쟁에 돌입했다. 1939년 9월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략했다. 1941년 12월 일본군의 전투기가 미국 하와이 진주만을 공습했다.

노동조합을 불법화하고 일터의 조건을 국가가 결정할 수 있게 된 독일과 일본과 이탈리아에서 노동자는 경제적 목적과 군사적 목표를 위해 무제한으로 동원되었다. 덕택에 극우 정치세력이 권력을 잡은 세 나라는 '추축국(the Axis powers)'이 되어 세계 전쟁에 나설 수 있었다.

섬나라 영국을 뺀 유럽 전역을 석권한 독일은 소련을 침략했다. 하지만, 독일군은 1942년 8월 시작되어 1943년 2월 끝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결정적 패배를 당했다. 이후 전세는 역전되어 독일군은 후퇴를 거듭했고, 소련군은 베를린을 목표로 대반격에 나섰다.

1944년 5월 소련군은 크리미아와 우크라이나를 해방시키고 루마니아에 진입했다. 스탈린(1878~1953)이 지휘하는 소련군이 동유럽을 휩쓸면서 유럽의 전황이 연합국에 결정적으로 유리하게 되었다. 독일-소련 동부전선의 전황을 살피던 미국은 마침내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개시했다.


ILO 필라델피아 선언: ‘노동의 상품화’가 전쟁의 원인이라는 반성

세계 전쟁이 추축국의 패배와 연합국의 승리로 마무리될 것이 분명해졌던 1944년 4월과 5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는 ILO 총회가 열렸다. 당시 ILO는 노동문제가 무역문제 및 금융문제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므로 전쟁이 끝난 후 평화로운 국제질서를 만들기 위해서는 ILO 자신이 노동기준만이 아니라 무역기준과 금융기준까지도 책임지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1919년과 비슷한 희망찬 분위기에 한껏 고무된 ILO는 파시즘과의 전쟁이 끝난 이후의 국제 질서를 필라델피아 총회에서 열띠게 논의했다. 그 결과 1919년 창립 때 헌장에 담긴 문구인 "사회정의 없이 항구적 평화 없다"에 버금가는 문구를 헌장에 삽입하게 된다.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Labour is not a commodity)"가 그것이다.

식민주의자와 파시스트가 노동을 시장에서 사고파는 상품으로 취급한 결과, 인류가 서로를 살육하는 세계전쟁이 일어났다는 반성이 총회장을 압도했다. 노동이 상품으로 취급되지 않는 질서, 다시 말해 무솔리니의 파시즘과 히틀러의 나치즘과 히로히토의 군국주의가 부활하지 않게 하기 위한 국제노동기준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그 결과 표현의 자유와 결사의 자유, 완전고용과 사회보장, 그리고 단체교섭권의 중요성을 담은 '필라델피아 선언'이 1944년 5월 10일 채택되었다.

1945년 4월 말 소련군이 베를린에 진입했다. 히틀러는 자살했고 독일군은 항복했다. 얄타협정에 따라 그해 8월 소련군이 만주와 북한을 침공했다. 소련군의 도쿄 점령과 일본 열도의 분단 그리고 천황제 폐지에 겁 먹은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결정했다.

1944년 5월 17일 워싱턴 백악관에서 루스벨트 대통령과 회의 중 필라델피아 선언에 서명하는 에드워드 J. 필랜 ILO 사무총장. ILO총회는 필라델피아 선언에서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고 밝혔다. 국무장관 코델 헐(Cordell Hull), ILO 필라델피아 회의 의장 월터 내시(Walter Nash), 미국 노동장관 프랜시스 퍼킨스(Frances Perkins), ILO 부국장 린지 로저스(Lindsay Rogers)가 함께했다. 사진_국제노동기구(ILO)
1944년 5월 17일 워싱턴 백악관에서 루스벨트 대통령과 회의 중 필라델피아 선언에 서명하는 에드워드 J. 필랜 ILO 사무총장. ILO총회는 필라델피아 선언에서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고 밝혔다. 국무장관 코델 헐(Cordell Hull), ILO 필라델피아 회의 의장 월터 내시(Walter Nash), 미국 노동장관 프랜시스 퍼킨스(Frances Perkins), ILO 부국장 린지 로저스(Lindsay Rogers)가 함께했다. 사진_국제노동기구(ILO)

전후 ILO의 재기: 필라델피아 선언과 국제노동기준 정립


1944년 봄 필라델피아 총회에서 시작된 ILO의 논의는 1948년 7월 9일 노동자단체의 설립과 활동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금지한 87호 '결사의 자유와 조직할 권리 보호 협약'의 채택으로 이어졌다. 극우 파시즘 체제에서 자행되던 국가에 의한 노동조합 활동 간섭을 용인하면 안 된다는 역사적 반성이 국제노동기준의 등장으로 빛을 보게 되었다.

일년 후인 1949년 7월 1일 노동자의 단체교섭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사용자가 '반(反)노조 차별행위(acts of anti-union discrimination)', 즉 부당노동행위를 하도록 허용해선 안 된다는 98호 '조직할 권리와 단체교섭 협약'이 채택되었다. 이로써 단체교섭은 노동자의 권리인 동시에 사용자의 의무라는 원칙이 국제법으로 확립되었다.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 초반은 ILO에게 활기찬 때였으나, 국제 정치적으로는 우울한 시기였다. 1945년 4월 루즈벨트가 임기 중 사망하면서 미소 반파시즘 연합의 지도자가 미국에서 사라졌다. 트루만(1884~1972) 행정부는 1947년 3월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면서 소련 봉쇄 정책을 개시했다. 이로써 냉전이 시작됐다.

미국에는 매카시즘으로 대표되는 반공주의 광풍이 불었다. 이를 계기로 미국 민주주의가 후퇴했고, 미소 연합에 바탕한 반파시즘 연합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 미국은 1944년 ILO 필라델피아 선언의 성과인 ILO 협약 87호와 98호에 대한 비준을 거부했다. 아직까지도 이 두 협약은 미국이 비준하지 않고 있다.


1930년대의 유령과 오늘의 위기: 역사는 반복하는가?


1930년대의 세계 정세는 오늘날 세계 질서가 어떻게 재편될 것인지에 대한 힌트를 준다. 1930년대에 들어 자유주의적 국제 질서가 무너졌다. 미국이 ‘나만 살자’며 보호무역주의를 주도했고, 세계 경제를 위기로 내몰았다. 경제적 갈등이 군사적 갈등을 부추겼다. 열강들은 군비경쟁에 나섰다. 그리고 나치즘-파시즘-군국주의가 일체가 되어 전 세계를 전쟁으로 몰아갔다.

윤석열 파면으로 우리는 가까스로 파시즘을 저지했다. 하지만, ‘K-민주주의’ 운운하며 자만할 때가 아니다. 극우세력의 득세는 한국만이 아닌 전 세계적 현상이고, 한국 사회 곳곳에 도사린 극우 내란 세력은 여전히 건재하다. 무엇보다 지금의 글로벌 정세가 1930년대와 너무나 유사하다.

2025년 지금 미국이 보호무역주의를 주도하고 있다. 그 여파로 세계 경제는 수렁으로 치닫고 있다. 세계 각국은 경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국제협력에는 나서지 않고 군비강화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 ‘K-방산’ 국뽕에 빠진 대한민국도 예외는 아니다. 윤석열은 친위쿠데타를 정당화하면서 ‘야당-언론-노조’가 공산주의와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윤석열의 내란이 성공했다면 노동권은 심각하게 파괴되었을 것이다.

극우와 보호무역주의에 경도된 정치적 결정과 경제적 행위들이 맞물린 결과가 세계전쟁의 발발일 것임을 2차 대전의 역사는 증명한다. 파시즘이 득세하고, 노동자들의 민주주의인 노동권이 파괴되자 전쟁이 일어났던 것이다. 1935년 이탈리아는 이디오피아를 침공했고, 1937년 일본은 중국을 침공했다. 역사학자들은 두 사건을 2차 대전의 서막이라 본다.


노동권의 평화의 초석이다


현재의 세계 정세는 정확히 1930년대 상황을 상기시킨다. 전쟁, 그것도 세계전쟁이 우리 곁에 가까이 와 있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역사는 증명한다. 노동권의 억압은 사회의 분열을 키우고, 분열은 전쟁으로 치닫는다. ILO의 창립 정신과 필라델피아 선언은 노동자 보호와 노동권 수호가 인류 평화의 초석임을 일깨운다.


"(노동자를 위한) 사회정의 없이 항구적 평화 없다"는 100년 전 ILO의 외침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리고 1944년 ILO가 필라델피아 선언에서 밝힌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도 마찬가지다. 두 정신이 모든 나라에서 구현할 때 우리는 세계 평화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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