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가 종전·핵군축·군비축소를 중요한 의제로 던진 것은 주목할 만하다. 미국의 동맹·우방들도 ‘자유주의 대 권위주의의 대결’과 결별하고, 적대 국가들과 관계 개선을 도모할 때이다. 이게 ‘각자도생의 시대’에 생존 전략이자, 국경·이념·체제·세대를 넘어 엄습해 오는 기후위기에 대처할 자세일 것이다.
2025-03-06 정욱식

정욱식 평화네크워크 대표,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
핵과 전쟁이 없는 세상, 모두가 공평하게 누리는 평화를 상상하고 궁리해 온, 평화 연구자이자 활동가로 1999년 평화네트워크를 설립해 활동하고 있다. 고려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군사안보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2006~2007년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 방문학자로 한미동맹과 북핵문제를 연구했다. 20여년 동안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군축⸱반핵⸱평화체제를 천착한 공로로 리영희상(2020)을 수상했다. 현재는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과 평화네트워크 대표를 맡고 있다. 『청소년에게 전하는 기후위기와 신냉전 이야기』(2023),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북한이 온다』(2023), 『미중 경쟁과 대만해협 위기』(2022), 『흥미진진한 핵의 세계사』(2020), 『김종대 정욱식의 진짜안보』(공저, 2014) 등 40여 권의 저작이 있다.
‘소 뒷걸음치다가 쥐 잡을까?’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전쟁과 기후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서 떠오른 속담이다. 기후변화를 “사기극”이라고 말해 온 트럼프는 ‘기후 빌런’의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 주고 있다. 취임 첫날에는 파리기후협정에서 탈퇴했다. 뒤이어 기후변화 정부간 패널(IPCC)에서 기후변화 보고서 작성에 참여해 온 과학자들에게 참여 중단을 요구했고,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 당사국총회에서 약속했던 모든 재정적 지원도 철회하겠다고 밝혔다. 미국 국내적으로는 더욱 거침이 없다. 2035년까지 100% 탄소 배출 없는 전력 공급, 2030년까지 2005년 대비 온실가스 50% 감축, 2030년까지 전기자동차 판매 비중 50% 달성, 2035년까지 100% 연방정부 차량 온실가스 배출 제로, 2030년까지 미국의 토지와 수자원의 30% 보존 등 전임 행정부들이 세웠던 기후 목표를 모조리 폐기했다. 이에 대해 김병권 녹색전환연구소 연구위원은 “트럼프가 한계선을 넘어 기후 대응 무력화로 폭주하고 있는 현상은, 사실 그의 무책임하고 강압적인 외교정책이나 무차별한 관세정책, 파괴적인 행정부 축소 개편과 동일한 궤도에 있다”라고 일갈한다. 적확한 지적이다.

그런데 본 연재인 ‘전쟁과 기후’의 관점에서 보면, 트럼프의 행보에서 특이점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전쟁과 평화의 관점에서 보면 트럼프는 비교적 후한 점수를 받을 법하다. 그는 1기 때에는 화학무기를 사용한 시리아에 제한적인 공습을 가하고 이란의 군부 실세인 거셈 솔레이마니(Qasem Soleimani) 사령관을 드론 공격으로 제거했지만, 새로운 전쟁을 시작하거나 개입하지는 않았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한 조지 W. 부시, 리비아 공습과 시리아 내전 개입 및 이슬람국가(ISIS) 격퇴전에 나선 버락 오바마와 비교해보면 “최근 미국 대통령 중 유일하게 새로운 전쟁을 시작하지 않은 대통령”이라는 평가가 무색하지 않은 셈이다.
또 돌아온 트럼프는 조 바이든 행정부 때 시작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도 끝내겠다고 공언하고 있고, 숱한 논란을 야기하면서도 이 방향으로 가고 있다. 2월 말에 백악관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는 우크라이나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자 면전에서 면박을 주는 것도 모자라 군사 지원을 일시 중단하라는 지시까지 내렸다. 그만큼 트럼프의 종전 의지는 확고해 보인다.
기로에 선 러-우 전쟁, 기후변화에 미친 영향은?
트럼프의 백악관 재입성과 젤렌스키와의 설전을 계기로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벌어진 최악의 지정학적 사건으로 일컬어지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향방은 짙은 안개 속에 빠지게 되었다. 우크라이나의 자체적인 무기·장비 보유량과 생산량은 55%이고 유럽의 지원양이 25% 정도를 차지한다는 점에서 미국이 빠지더라도 우크라이나가 당분간 교전 능력은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우크라이나가 불리해질 수밖에 없다. 미국의 대규모 지원이 있었던 상황에서도 러시아가 우세했는데, 미국의 지원이 사라지면 우크라이나의 열세는 가속화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논란의 소지가 큰 줄은 알지만, 나는 조속한 종전이 우크라이나에게도 최악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전쟁이 장기화될수록 무고한 희생자는 늘어나고 총체적인 위기에 몰린 우크라이나가 “실패한 국가”로 전락할 위험도 커진다. 기후위기 대처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그렇다.
전쟁은 기후환경을 파괴하는 최악의 행위에 해당한다. 러-우 전쟁은 이를 너무나도 잘 보여 주고 있다. 유럽기후재단(ECF)이 후원하는 비영리단체 ‘전쟁의 온실가스 회계 이니셔티브(IGGAW)’가 러우전쟁 3년째를 맞이해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군사 활동, 재건 활동, 산불, 난민 이동, 민간 항공기 운항 변경 등으로 지난 3년간의 전쟁으로 배출된 온실가스의 양은 약 2억3000만톤(CO₂e)에 달했다. 이는 약 1억2000만 대의 내연기관 자동차가 1년 동안 배출하는 양과 맞먹는다.

또 이 전쟁을 계기로 이전까지 국제사회의 핵심적인 화두였던 기후위기 대처가 뒷전으로 밀려나고, 전 세계적인 군비경쟁이 격화된 것 역시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이다. 트럼프의 종전 의지를 불만과 불안의 관점에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역설적인 기회의 공간도 찾아야 한다는 뜻이다. 트럼프가 종전을 서두르는 이유에서 그 일단을 찾을 수 있다.
트럼프가 가장 하고 싶어 하는 일은 중국 및 러시아의 정상들과 만나 핵군축을 단행하고 국방비를 크게 줄이자고 합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트럼프는 취임 직후에 “우리는 비핵화를 할 수 있는지 알고 싶은데, 나는 그것이 매우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며 미국·러시아·중국이 핵군축 협상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그는 “내가 원하는 첫 만남 중의 하나는 중국의 시진핑 주석,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과 만남이다”며 “나는 ‘우리 군사예산을 절반으로 줄이자’라고 말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서로를 겨냥해 돈을 쓰고 있는데, 우리 사이가 좋아지면 그런 돈을 더 좋은 목적에 쓸 수 있다”며, “나는 그런 것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라고도 했다. 트럼프는 3대 핵보유국이자 군비 지출 국가들인 미·중·러 정상들이 모여 세계사의 한 페이지를 멋지게 장식해보자는 야망을 품고 있는 것이다.
문제아 트럼프, 그러나
여러모로 볼 때 트럼프가 문제적 인물인 것은 분명하지만, 종전·핵군축·군비축소를 중요한 의제로 던진 것은 분명 주목할 가치가 있다. 21세기 들어 전쟁이 확산되고 여러 군축 조약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있으며 군비경쟁이 격화되고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서방 진영에선 트럼프가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를 무너뜨리고 있다고 한탄하는 목소리가 높지만, 정작 자유주의적 국제질서가 맹위를 떨칠 때 상기한 문제들이 극심해졌다.
하여 이제는 미국의 동맹·우방들도 세계를 ‘자유주의 대 권위주의의 대결’로 봤던 이분법적 세계관과 결별하고, 적대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을 도모할 때이다. 이게 ‘각자도생의 시대’에 가장 현명한 생존 전략이자, 국경·이념·체제·세대를 넘어 엄습해오고 있는 기후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슬기로운 자세일 것이다. ‘기후 빌런’으로서의 트럼프와 더불어 “피스메이커”가 되고자 하는 그의 욕망도 함께 보면서 말이다.
참고 자료
정욱식, 『달라진 김정은, 돌아온 트럼프』, 갈마바람, 202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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