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소연 2024-04-25
연세대 인류학과 졸업. 서울대 지리학과 석사과정에서 정치생태학을 연구하고 있다. 인간의 정치활동이 생태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이 크다. 복잡한 논의를 통해 해답을 찾는 과정이 소중하다는, 스물여섯 살 '지구여자'다
'전 지구적 스케일'에 기대고 압도되다
기후 위기, 생태계의 파괴, 멸종 등 현시대에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위기들은, 늘 어디서부터 접근하면 좋을지를 모르는, 문제의 복잡함을 재확인시킨다. 우리는 지구 전체를 압도하며 나타나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결정적인 한 가지의 답을 고민하면서, ‘지구를 구하자’, ‘온실가스 프리’와 같은 수사들을 입에 올린다. 그리고 이 수사들은 이러한 위기가 갖는 전 지구적 스케일이라는 특징에 적극적으로 기대고 있다. 미디어들에서는 푸른 구슬 같은 지구의 이미지가 어떻게 망가지는지를 보여주며 이 거대한 위기들을 재현해낸다.
며칠 전 4월 22일은 지구의 날이었다. ‘지구의 날’이라는 이름도 나에게 종종 이러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지구의 날에 우리는 한시에 소등하고 플라스틱을 덜 쓰고 나무를 심으며 지구를 구하기 위한 다양한 실천들을 집합적으로 해내려고 시도한다. 그러면서 그 사소한 실천들이 얼마나 큰 영향력을 발휘할지에 대해 언쟁하기도 한다. 갑자기 친환경적으로 소비할 대안들이 마구 쏟아지기도 하는데, 우리는 그것을 ‘지구를 위해서’라고 말한다. 무엇이 이 커다란 행성을 정말로 위하는 일인지, 무엇이 이 거대한 위기의 방향을 바꿀지를 머리 아프게 고민하는 날이다.
로컬한 스케일, '패치들'로 가까운 변화를 살핀다
인류학자 애나 칭(Anna Lowenhaupt Tsing)은 이 전 지구적 문제의 스케일에 접근하는 다른 방식을 제안한다. 칭은 로컬한 스케일에서 발생하는 이야기들을 다루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면서, 인류세의 위기는 어디에서나 같은 모양이 아님을 드러낸다. 즉, 기후변화가 특정한 곳에 특수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새로운 스케일링의 단위를 ‘patches(패치들)’라고 부른다. 패치는 커다란 위기의 동질적인 특징보다 특수한 맥락과 내부의 존재들에 더 주의를 기울인다. 특히 패치는 명확하게 정해진 공간적 경계로 폐쇄되어 있는 게 아니라, 다른 구성원 그리고 다른 패치들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열려 있다. 이에 다양한 스케일과 구조 간의 역동적인 연결성을 확인할 수 있다.
패치들은 위기를, 그리고 그 위기를 바라보며 압도당하는 우리의 공포심을 바꾸어내는 힘이 있다. 패치는 위기를, 전 지구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가까운 것, 그리고 개인적인 것으로 끌어오기 때문이다. 위기는 삶을 위협하는 위험이라는 한 가지의 방향성과 방식만으로 다가오지 않으며, 늘 패치 내에 있는 구성원들과 상호작용하기에, 늘 예측 가능한 것도 아니다. 패치에서, 다른 구성원들과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 속에서, 우리는 변화를 경험하고, 변화가 가져다주는 위기에 주의를 기울이고, 위기에 대응해 행동을 취하기도 한다.
주변에 관심을 기울이면, 압도되지 않는다
패치를 통해 ‘지구를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지구의 위기로, 내가 서 있는 이곳에 어떤 변화를 줄지, 어떤 방식으로 그 위기에 대응할지, 그에 따라 어떤 영향들이 생겨날지와 같은 질문들이 계속해서 던져질 것이고, 또 유의미해질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들에 답하려면 주변의 다른 존재들에게 더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중요해진다. 이 역동적인 과정에서, ‘과연 지구를 구하는 것이 가능한가요?’라는 질문이 주는 압도감에 쉽사리 무기력해질 여유는 없다고 예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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