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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와 정치ㅣ윤효원ㅣ1955년 반둥, 오래된 미래

최종 수정일: 7월 16일

 

윤효원 2024-07-12

윤효원 아시아 노사관계 컨설턴트

IndustriALL Global Union 컨설턴트 |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감사 |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연구위원

 

 

비동맹운동의 출발지, 인도네시아 반둥


인도네시아 노동조합 교육을 위해 반둥을 다녀왔다. 반둥은 비동맹운동(Non-Aligned Movement)의 출발점이 된 ‘아시아-아프리카 회의’가 열린 곳이다. 비동맹운동의 시발점으로 대표되는 반둥의 역사는 올 때마다 평등하고 평화로운 국제 질서가 어떤 원칙과 방법을 통해 만들어져야 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많은 것을 느끼게 한다.


반둥 회의로도 불리는 아시아-아프리카 회의는 1955년 4월 18일~24일까지 1주일간 열렸다. 당시 전 세계 인구의 54%를 대표하는 29개 나라에서 대표단을 보냈다. 반둥 회의는 식민주의를 끝장내고 신식민주의에 반대하기 위해 아시아-아프리카 나라들의 경제적 문화적 협력을 증진할 목적으로 개최되었다.


1955년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열린, 아시아와 아프리카 29개국 대표들의 비동맹회의 , 반둥 회의


2차 대전 이후 식민주의를 뚫고 독립한 신생국인 인도네시아(1945년 8월 독립), 버마(1948년 1월 독립), 인디아(1947년 8월 독립), 실론(1948년 2월 독립, 지금의 스리랑카), 파키스탄(1947년 8월 독립)이 회의를 기획하고 주도했다. 인도네시아 대통령 수카르노(생애 1901~1970, 재직 1945~1967)와 인디아 수상 자와할랄 네루(1889~1964, 재직 1947~1964)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두 사람과 더불어 반둥 회의에서 세계적 주목을 받은 이는 중화인민공화국 총리 저우언라이(생애 1898~1976, 재임 1954~1976)였다.


회의 참석을 위해 저우 총리가 타려 했던 여객기가 미국제 폭탄 테러로 남중국해에 난파되면서 탑승자 19명 중에 16명이 사망하고 생존자 3명은 인도네시아 해안경비대에 의해 구출되었다. ‘건강 문제’로 이 비행기를 타지 않은 저우언라이는 반둥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회의에서는 이집트 대통령 가말 압델 나세르(생애 1918~1970, 재임 1956~1970)과 버마 총리 우 누(생애 1907~1995, 재임 1948~1962)도 주목을 받았다. 나세르는 반둥 회의을 통해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독립 운동을 지지하고,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연대를 강화하고자 했다. 우 누는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 함께 독립과 중립적 외교 정책을 강조하며 회담을 지원했다.


반둥 회의에 참석 중인 각국 대표들(왼쪽 이집트 나세르 대통령, 오른쪽 흰 모자를 쓴 인디아 네루 수상)


주권 존중, 내정 불간섭, 평화 공존, 군비 축소, 핵무기 확산 반대, 경제 문화 협력 촉진


반둥 회의은 식민주의의 잔재를 청산하고 제국주의적 냉전 질서를 극복하기 위한 국제 질서의 원칙으로 주권 존중, 내정 불간섭, 평화 공존, 군비 축소, 핵무기 확산 반대,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들 간의 경제 및 문화 협력 촉진을 내세웠다. 이러한 원칙들은 식민 통치와 독립 투쟁의 경험을 공유한 국가들 사이의 연대감에서 연유했다.


반둥 회담에서는 (1) 유엔헌장의 목적과 원칙 존중 (2) 모든 국가의 주권과 영토 보전 존중 (3) 모든 인종과 국가의 평등 인정 (4) 내정 불간섭의 원칙 존중 (5) 유엔 헌장에 따라 모든 국가의 자위권 인정 (6) 침략 행위 또는 위협 행위 금지 (7) 국제 분쟁의 평화적 해결 추구 (8) 상호 이익과 협력을 통한 관계 증진 (9) 정의와 국제의무 존중 (10)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모든 형태의 식민주의 배격 등 열 가지 원칙이 채택되었다.


반둥에서 회의가 열린 6가지 이유


반둥이 1955년 아시아-아프리카 회의의 개최지로 선택된 이유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결합된 결과다. 첫째, 인도네시아는 지리적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교차점에 위치하고 있다. 이로 인해 반둥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들이 모이기에 적합한 장소로 간주되었다. 둘째, 인도네시아는 1945년에 독립을 선언한 신생 독립국이었다. 반둥 회의을 통해 인도네시아는 독립과 자주를 상징하는 나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당시 인도네시아의 대통령 수카르노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들의 독립과 연대를 강하게 지지했다. 그는 인도네시아가 제3세계의 리더로 자리매김하기를 원했다.


셋째, 인도네시아는 당시 냉전의 양대 세력인 미국과 소련 중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중립적 위치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중립성은 반둥 회의가 비동맹 국가들의 모임으로서 적합한 장소로 선택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넷째, 인도네시아는 다양한 민족과 문화가 공존하는 나라로, 다문화적 배경을 가진 국가들이 모이는 회담에 적합한 장소였다. 다섯째, 인도네시아는 오랜 기간 동안 식민 지배에 저항해 왔으며, 이는 식민주의에 반대하는 회담의 정신과 부합했다. 여섯째, 반둥은 회담을 개최할 수 있는 적절한 회의 시설과 숙박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요인들이 결합되어 반둥이 1955년 반둥 회담의 개최지로 선택되었다.


글로벌 남반구가 주도하는 다극 체제로 이행 시기, 반둥 회의가 주는 시사점들


오늘날 세계는 미국이 지배하는 글로벌 북반구(Global North) 중심의 일극 체제가 붕괴하고 글로벌 남반구(Global South)가 주도하는 다극 체제로 이행하고 있다. 격변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는 현 시점에 반둥 회의는 인류가 나아갈 방향과 관련해 여러가지 시사점을 던지고 있다.


첫째, 반둥 정신은 개발도상국들이 공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협력하는 남남 협력(South-South cooperation)의 개념에 계속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러한 협력은 G77(Group of 77)과 BRICS(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 그룹과 같은 다양한 국제적 조직의 등장으로 귀결되고 있다.


둘째, 반둥 정신을 토대로 등장한 비동맹운동은 여전히 건재하며 현대의 세계적 과제에 적응하고 있는 개발도상국들이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고 경제 불평등, 기후 변화, 글로벌 안보 등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하는데 있어서 방향을 제시한다.


셋째, 반둥 회의의 원칙은 글로벌 권력이 소수 국가에 집중되지 않고 여러 국가에 분산된 다극화 세계의 개념을 지지한다. 이는 신흥 경제국과 지역 강국이 더 큰 영향력을 추구하고 보다 균형 잡힌 국제 질서를 창출하려는 현재의 글로벌 정치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


넷째, 반둥의 원칙은 강대국이 약소국에 경제적 또는 정치적 영향을 미치는 신식민주의적 관행에 대한 저항을 촉진한다. 이러한 저항은 국제 금융기관의 개혁, 공정한 무역관행 보장, 국가주권 보호 노력을 통해 새로운 국제 질서를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다. .


남남 협력, 비동맹운동의 지속적 성장, 공정하고 평등한 글로벌 질서 창출의 나침반


1955년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열린 ‘아시아-아프리카 회의’는 반식민 연대와 독립적인 국제 관계의 상징으로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녔다. 그리고 70년이 지난 지금 반둥의 정신은 21세기 들어 점점 확산되고 있는 남남 협력과 비동맹운동의 지속적인 성장, 그리고 보다 공정하고 평등한 글로벌 질서를 창출하기 위한 개발도상국들의 노력에서 나침반 역할을 하고 있다.


반둥 시내 중심가에는 아시아-아프리카 회의가 열렸던 회의장과 참가자들이 묵었던 호텔이 그대로 남아 있다. 회의장은 박물관이 되었지만, 호텔은 지금도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 내년은 반둥 회의가 열린 지 70주년이 되는 해다. 인류는 그때의 교훈과 지혜를 되살려 3차 대전의 참화를 예방할 수 있을 것인가. 진정한 평화를 원한다면 윤석열 대통령이 갈 곳은 나토 회담이 열리는 미국 워싱턴이 아니라 아시아-아프리카 회의가 열린 반둥이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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