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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와 정치ㅣ윤효원ㅣILO가 기억하는 두 사람

 

윤효원 2024-09-06

윤효원 아시아 노사관계 컨설턴트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감사 |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연구위원

 

 

수천 만 명을 죽음으로 몰고 간 1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세계 열강은 두 가지 상반된 길로 나아갔다. 러시아에서는 1917년 말 볼셰비키가 이끈 혁명이 일어나 공산주의 정부가 탄생했다. 공산주의 파도는 독일을 비롯한 전 유럽을 휩쓸었지만 러시아를 빼고는 실패로 끝났다.

다른 한편으로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등 전승국들은 전쟁을 통해 파국으로 치달은 자본주의 체제를 개선할 필요를 느꼈다. 전후 세계 질서를 설계하려 세계 열강의 지도자들이 프랑스 파리에 모였다.


1919년 5월 27일, 파리강화회의에 참석 중인 빅포(Big Four). 왼쪽부터 데이빗 로이드 조지 영국 수상, 빅토리오 에마누엘레 올란도 이탈리아 수상, 조지 클레망소 프랑스 수상,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

1919년 ILO의 탄생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 영국 수상 데이빗 로이드 조지, 프랑스 수상 조지 클레망소, 이탈리아 수상 빅토리오 에마누엘레 올란도가 '빅포(Big Four)'로 불리며 강화회의를 이끌었다. 대만(1895년)과 조선(1910년)을 식민지로 만들고 아시아 강국으로 떠오르던 일본도 영국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전승국 자격으로 5명의 대표단을 파견했다.

파리강화회의가 설치한 노동위원회는 1919년 1월과 4월 파리와 베르사이유를 오가며 국제노동기구(ILO)의 밑그림을 그렸다. 미국노동연맹(AFL) 위원장 사무엘 곰퍼스가 의장을 맡았다. 위원회는 벨기에, 쿠바, 체코슬로바키아,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폴란드, 영국, 미국 아홉 개 나라로 이뤄졌다.

각국의 노사정, 즉 노동자-사용자-정부 대표자를 한데 모아 3자 기구를 만든다는 안이 마련됐다. 국제 노사정 3자 기구에서 모든 나라와 공장에 적용되는 국제 노동법을 만들자는 목표를 실천할 조직으로 국제노동기구(ILO)를 만드는 데 합의한 것이다.

이렇게 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볼셰비키혁명의 산물로 태어난 국제노동기구(ILO)는 “사회정의 없이 항구적 평화 없다”는 구호를 내걸었다. 평화의 전제는 사회정의의 실현이고, 사회정의는 국제 사회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노동 기준의 실천을 통해 이룰 수 있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름에 들어간 ‘노동(Labour)’이란 단어 때문에 ILO를 대단히 진보적인 국제기구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ILO는 세계 전쟁을 억제하고 공산주의 혁명을 예방하려는 보수적 목적을 갖고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같은 제국주의 열강들이 만들어낸 합의인 파리강화회의의 베르사유조약 제13장(노동)에 따라 노사정 3자 기구로 1919년 가을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서 출범했다.


‘하루 8시간’, 로버트 오언


근로시간 단축과 국제노동법의 도입 같은 노동문제(Labour Questions)를 다룰 국제기구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19세기에 이미 제시되었다. 영국 웨일즈 출신의 산업가 로버트 오언(1771~1858)과 스위스 출신의 산업가 다니엘 르그랑(1783~1859)이 대표적 주창자들이다.

1771년 영국 웨일즈에서 태어난 로버트 오언은 십대와 이십대를 산업혁명으로 들썩이던 런던과 맨체스터에서 직장 생활을 하면서 경영자로서의 자질을 키웠다. 1799년 앤 캐롤라인 데일과의 결혼은 그에게 새로운 기회를 가져다 주었다. 아내의 아버지가 스코틀랜드의 대공장주 데이비드 데일(1739~1806)이었기 때문이다.


로버트 오언의 초상. 1835년 헨리 토마스 라이얼(Henry Thomas Ryall)의 작품

자선가이기도 했던 자본가 데일은 토지정리법 때문에 산이나 골짜기에 자리한 전통적 공유지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던 사람들이 살아갈 터전을 만들고 싶어했다. 이들을 데려다 기숙사를 세우고 강의 수력을 이용해 방적기계를 돌리는 공장에서 일하게 했는데, 이렇게 건설된 동네가 뉴라나크(New Lanark)였다.

오언 부부는 뉴라나크에 신혼집을 차렸다. 20대 초반부터 공장경영자로서 실력을 쌓아온 오언은 계몽주의 개혁사상의 열렬한 옹호자였다. 청년 오언은 공장노동자들의 건강과 근로조건을 개선하는 데 관심이 많았다. 그는 바꾸고 싶었고,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근로시간의 단축이 공장 개혁의 출발점이라 확신한 오언은 1810년 그의 뉴라나크 공장에서 하루 8시간을 시도했다. 1813년에 쓴 『새로운 사회관』에서 노동자보호법, 아동노동 금지, 빈민구호법을 제안했다.

1817년 오언은 “Eight hours labour, Eight hours recreation, Eight hours rest”라는 슬로건 하에 하루 8시간 목표를 정식으로 천명하면서 사회주의를 포용하게 되었다. 백여 년 후인 1919년 ILO는 ‘하루 1시간―주 48시간’을 제1호 협약으로 채택하게 된다.

1825년 미국으로 건너간 오언은 인디아나의 하모니타운을 매입해 뉴하모니(New Harmony)로 명명하고 공장 개혁을 넘어 사회개혁을 위해 애썼다. 이러한 실천은 노동자 협동조합운동의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1833년 환갑이 넘어 영국 런던에 정착한 오언은 1834년 영국 최초의 노동자 전국 조직인 대통합전국노동조합(Grand National Consolidated Trade Union) 건설에 깊이 관여했다.


‘국제노동법이 필요하다’, 다니엘 르그랑


1783년 스위스 바젤에서 태어난 다니엘 르그랑도 동시대인인 로버트 오언처럼 직업이 자본가였다. 아버지의 공장을 물려받은 르그랑은 프랑스 알사스에 리본 공장을 세우면서 공장주가 되었다.

독실한 기독교도였던 르그랑은 소득의 절반은 하느님을 위해, 나머지 절반은 가난한 자들을 위해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자신의 공장을 위해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주택과 학교를 제공하면서 노동자들의 주거환경과 근로조건을 개선하려 애썼다.


다니엘 르그랑의 초상. 장바티스트 싱리(Jean-Baptiste Singry)의 19세기 작품

르그랑은 부모와 자녀가 같이 일하는 가족 단위의 소규모 공장을 이상적인 경제 체제로 봤다. 가족의 유대를 토대로 한 경제 활동이 장기적으로 사회에 혜택이 된다고 믿은 그는 공장에 기계를 들이지 않고 노동자들이 집에서 일하게 했다.

르그랑은 말년에 이르러 노동을 보호하는 국제적 법률 체계를 구상했고, 1841년 쓴 편지에서 “공장노동자의 나이, 일하는 시간, 그들의 배움을 개선하고 그들을 파멸과 지옥 같은 형벌에서 구해내기 위해 법률을 통한 개입이 긴급하고 예외 없이 요구된다”라고 주장했다. 이 꿈은 1919년 ILO의 출범으로 이뤄진다.


2019년 출범 100주년을 맞으면서 ILO는 국제노동기준 체제의 확립에 기여한 인물로 두 사람을 지목했다. 세계노동운동사는 로버트 오언을 ‘공상적 사회주의자’로, 다니엘 르그랑을 ‘기독교 사회주의자’로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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