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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와 정치ㅣ윤효원ㅣ김정남 '암살'과 한국계 CIA 요원의 ‘숙청’

최종 수정일: 7월 29일

 

윤효원 2024-07-26

윤효원 아시아 노사관계 컨설턴트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감사 |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연구위원

 

 

전직 CIA 요원, 박정현


미국에서 공직을 차지한 한국계 미국인 가운데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부차관보에 임명된 박정현(미국명 Jung H. Pak, 1974년생)이란 사람이 있다. 바이든 당선 후 인수위원회에 참여하고 브루킹스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하기 전에 박정현은 미국 국가정보국(DNI)과 중앙정보국(CIA)에서 일했다.

박정현에게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2020년 출간된 Becoming Kim Jong Un(국내 출간 제목은 『비커밍 김정은』)란 책 때문이다. 부제는 ‘북한의 불가사의한 젊은 독재자에 대한 전직 CIA 요원의 통찰’이다. 책이 나오자마자 샀다. 그 이유는 2017년 2월 13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2에서 죽은 김정남 사건을 박정현이 어떻게 설명하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쿠알라룸푸르에는 국제공항이 두 개 있다.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과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2다. 국제공항은 대한항공 같은 국적항공기가, 국제공항2는 저가항공기가 드나든다. 두 공항은 택시로 5분 거리다. 김정남이 죽은 공항은 국제공항2로 서울 강남의 서울고속버스터미널과 비슷한 분위기다. 김정남이 국제공항2에서 오전 10시 50분에 출발하는 마카오행 저가항공기를 타려 한 이유는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짐작된다.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일어난 살인


박정현의 책에 김정남 사건은 ‘말레이시아에서 일어난 살인’이라는 제목으로 10장에 나온다. 그는 김정남이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죽었다고 썼다. 사망 당시 김정남이 입었던 복장은 장황하게 설명하면서 사망 장소 설명은 정확성이 떨어진다. 인도네시아와 베트남 국적자 여성 두 명이 맨손으로 VX라 불리는 독성화학물질을 김정남의 얼굴에 문지르고 달아났다. 신경계에 가공할 손상을 가하는 VX를 두고 박정현은 “단 한 방울로 살상이 가능한 세계에서 가장 치명적인 물질 중 하나”라고 썼다.

김정남을 덮친 이는 인도네시아인 시티 아이샤(당시 25세)와 베트남인 도안 티 흐엉(당시 28세)으로 밝혀졌고, 사건 며칠 후 체포돼 살인 혐의로 재판에 회부됐다. 치명적 화학물질을 사용했는데도 두 청년은 신경계나 피부, 호흡기에 아무런 손상을 입지 않았다. 김정남을 돕던 공항 직원들이도 마찬가지였다. 말레이시아 경찰은 범행에 직접 관여한 리지현·홍성학·오종길·리재남 등 북한인 4명이 사건 직후 말레이시아를 떠나 체포하지 못했다고 발표했다.

사건 며칠 후 경찰은 북한인 리정철을 체포했으나 증거가 부족하다며 석방했다. 리정철은 3월 초 베이징을 거쳐 평양으로 돌아갔다. 경찰은 또 다른 용의자로 북한대사관 2등 서기관 현광성과 고려항공 직원 김욱일·리지우를 북한대사관에서 조사했으나 별다른 혐의를 찾지 못했다. 같은 해 3월 31일 이들은 김정남의 유해와 유품과 함께 평양에 도착했다. 그리고 두 해가 지난 2019년 3월 시티 아이샤가 인도네시아로, 그해 5월 도안 티 흐엉이 베트남으로 돌아갔다. 말레이시아 법원이 이들에게 적용된 살인 혐의를 기각하고 석방시켰기 때문이다.

말레이시아에는 정보기관이 따로 없고, 경찰 내부의 특수부(Special Branch)가 정보와 방첩 임무를 맡고 있다. 이는 영국 식민지였던 나라들의 공통점이다. 당연히 김정남 사건을 수사한 기관은 일반 경찰이 아니라 미국과 영국, 한국을 비롯한 각국의 정보기관과 얽혀 있는 말레이시아 경찰 특수부다.

     

중년의 한국계 미국인과 김정남의 만남


나는 2017년 2월 김정남이 죽었을 때 김정남이 CIA나 국가정보원의 끄나풀이 아닐까 추정했다. 2019년 6월 워싱턴포스트의 베이징 지국장을 지낸 애나 파이필드는 “김정남이 CIA 정보원”이었다는 사실을 담은 The Great Successor(국내 출간 제목은 『마지막 계승자』)란 책을 냈다. 예측이 사실임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미국 정보기관 관계자를 취재한 파이필드에 따르면 김정남은 주로 싱가포르나 말레이시아에서 CIA 요원을 만나 정보를 팔았다고 썼다.  

김정남과 미국 정보기관의 연계를 가장 먼저 보도한 언론은 일본의 『아사히신문』이다. 2017년 5월 13일자에서 수사 간부의 발언을 인용해 김정남이 그해 2월 6일 오후 홀로 말레이시아에 도착해 쿠알라룸푸르를 방문하고 2월 8일 휴양지로 유명한 랑카위섬에 있는 어느 호텔로 가서 다음 날인 2월 9일 “방콕에 거점을 둔 중년의 한국계 미국인을 만났다”라고 보도했다. 이 미국인은 말레이시아 경찰이 “미국 정보기관과 연계가 있다고 보고 입국할 때마다 감시하던 인물”이었다.

2018년 1월 29일 김정남 살인 혐의를 받는 두 청년의 재판이 열렸다. 증인으로 출석한 수사 책임자 완 아지룰 니잠은 김정남이 랑카위의 호텔에서 미국인을 만난 사실은 맞으나 그 미국인에 관한 정보는 획득하지 못했으며 호텔 이름 등 구체적인 사실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로써 김정남의 방문 목적이 미국인을 만나려는 것임이 공식적으로 확인됐다. 그리고 2019년 6월 애나 파이필드의 책이 나옴으로써 김정남이 CIA의 정보원임이 드러났다. CIA 경력을 갖고 동아시아·태평양 부차관보로 임명된 중년의 한국계 미국인 박정현의 책은 애나 파이필드의 책이 나온 지 거의 1년이 지나 나왔다. 하지만 박정현은 불성실하고 비겁하게도 김정남과 CIA의 커넥션에는 침묵했다.

     

노트북과 현금 12만달러


김정남이 죽을 때 메고 있던 검은색 가방에는 노트북 컴퓨터와 현금 12만달러(한화 1억6635만원)가 들어 있었다. 김정남이 말레이시아 은행에서 돈을 인출한 기록은 나오지 않았다. 『아사히신문』 2019년 10월 11일자는 익명의 말레이시아 수사 간부를 인용해 김정남이 이 돈을 미국 정보당국과 연결된 인물에게서 정보 제공 대가로 건네받은 것일 수 있다고 추정했다. 이 신문은 말레이시아 경찰이 살해된 김정남의 소지품을 검사해보니 검은 가방이 있었고 그 안에서는 100달러짜리 현금 다발이 대량으로 발견됐다고 보도했다. 대부분 신권으로 300장씩 묶인 100달러짜리가 모두 네 다발이었다. 세계 어느 나라나 입국시 별도로 신고하지 않는 이상 1만달러 넘는 현금을 갖고 출국할 수 없다. 말레이시아 경찰이 노트북 컴퓨터를 포렌식하니 여러 파일이 누군가의 유에스비로 옮겨진 게 확인됐다.

현지 언론 『더 스타』 2022년 10월 5일자에 따르면, 세팡 지역(Sepang District) 경찰서장 완 카마룰 아즈란 완 유소프(Wan Kamarul Azran Wan Yusof)는 2017년 2월 공항에서 살해된 “김철(Kim Chol)”이라는 이름의 여권(여권번호 836410070)을 소지한, 사망자의 친척들에게 현금을 수령할 것을 촉구한다고 알렸다. 세팡경찰서는 10월 4일 발표한 성명에서 “유가족들은 전화 016-435-8222로 모하마드 아누아르 하님(Mohd Anuar Hanim) 조사관에게 연락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보도자료 발표 후 6개월 이내에 유가족이 물품을 수령하지 않을 경우, 해당 물품은 국가 재무부로 이관될 것입니다.”라고 밝혔다.

그런데, 보도가 나간 다음 날인 10월 6일 세팡경찰서는 김정남의 유가족에게 그의 개인 소지품을 찾아가라는 내용의 이틀 전 발표한 성명을 철회했다. “부킷 아만 특별수사부(Bukit Aman Special Branch)는 10월 4일에 발표된 언론 성명을 철회하고 취소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불편을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내용이었다. 이유에 대해 세팡경찰서장은 ‘나라들 간의 문제’라며 더 이상의 설명은 하지 않았다.

부킷 아만 특별수사부는 말레이시아 경찰의 특별수사부로, 주로 테러, 첩보 활동, 반국가 활동 및 기타 국가 안보와 관련된 사건을 조사하고 대응하는 역할을 한다. 부킷 아만은 말레이시아 경찰 본부가 위치한 지역의 이름이다.

     

골칫거리, VX, 신원보증인


나는 김정남의 암살에 미국과 한국의 정보당국이 개입되었을 수 있다고 추정한다. 두 조직은 오랫동안 김정남에게 돈을 주면서 정보를 구입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김정남의 정보는 가치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을 것이다. 하지만 김정남은 허접한 정보를 팔면서 거액을 요구했고, 돈을 안 주면 자신과 미국 정보당국, 자신과 한국 정보당국의 관계를 까발릴 것이라고 협박했을 것이다.

‘유용한 정보원’에서 ‘무익한 골칫거리’로 전락한 김정남은 북한 당국에게도 골칫거리였다. 미국-남한-북한, 이 3자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한국계 CIA 요원”을 만나러 말레이시아에 온 김정남을 둘러싸고 모종의 협업과 공모가 이뤄졌다고 추측한다. 여기에 말레이시아 경찰 특별수사부가 암묵적으로 동조하면서 김정남의 암살이 성공적으로 이뤄졌던 것은 아닐까.

이렇게 4개국의 긴밀한 공조가 가능했기에, 암살을 실행했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은 베트남과 인도네시아의 젊은 여성들은 결국 감옥에서 석방되어 그리던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나는 두 여성이 김정남 얼굴에 발랐다는 액체가 “단 한 방울로 살상이 가능한 세계에서 가장 치명적인 물질”인 VX였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갖고 있다.

2017년 2월 당시, 북한 정부는 시신 부검에 북한 관계자의 동참을 요구했으나, 말레이시아 당국은 허용하지 않았다. 말레이시아 당국은 화학물질을 연구하는 해외의 전문기관에 김정남 얼굴에서 채취한 물질을 보내어 국제사회의 검증을 받겠다고 말했으나, 이것도 이뤄지지 않았다.

김정남이 암살되기 석 달 전인 2016년 11월 초, 베트남 여성 흐엉은 제주국제공항으로 무비자 입국해 3박 4일 동안 제주도에 머물렀다(연합뉴스 인터넷판 2017년 2월 22일자). 당시 “20대 한국인 남성이 신원보증인 역할”을 하며 그녀의 편의를 봐줬다. 흐엉은 입국 과정에서 이 남성이 자신의 남자친구라고 주장했다. 이 남성은 베트남에서 관광 가이드를 하며 흐엉을 알게 됐고, 김정남 암살사건이 발생한 다음 날 프랑스로 출국했다.

정보당국 관계자는 “흐엉의 신원보증인은 김정남 사건과 직접적 연관성이 없는 것으로 보이나, 베트남 여성 흐엉의 한국 입국 행적 등에 대해 계속 조사하고 있다.”라고 말했다고 연합뉴스는 보도했다. 하지만, 이후 의미 있는 후속 보도는 없었다.

     

CIA 경력 한국계 여성 2인의 숙청


박정현의 Becoming Kim Jong Un을 읽었을 때, 말레이시아 경찰이 법정 증언에서 말한 “방콕에 거점을 둔 중년의 한국계 미국인 CIA 요원”이 남자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박정현이 김정남을 “플레이보이, 순수주의자”라 평한 대목에서 그런 느낌을 받게 되었다. 혹시 그 CIA 요원이 여자라면, 김정남이 만난 요원은 박정현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바이든이 대통령 임기를 시작할 때인 2021년 1월 20일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부차관보에 임명되었던 박정현은 2023년 11월 21일 북한담당 특별대표에 지명되었다. 그런데 1년도 되지 않은 지난 7월 5일 갑자기 사임했다. 그리고 열흘 정도 지난 7월 16일 박정현과 마찬가지로 한국계 미국인으로 CIA에서 일한 경력을 갖고 바이든 행정부에서 미국의 한반도 정책에 관여했던 수미 테리(Sue Mi Terry, 1972년 서울 출생으로 추정, 12살 때 부친 여의고 모친과 미국행)가 미국 정부에 신고하지 않고 한국 정부를 대리해 일했다는 혐의로 미 연방 검찰에 의해 기소되었다.

김정남이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2에서 암살당한 게 2017년 2월이다. 7년이 넘게 흐른 지금 미국 정부의 요직에 앉아 미국의 이익을 위해 남한과 북한 사이의 갈등을 부추기면서 한반도를 전쟁 위험으로 몰고가던 CIA 경력의 한국계 여성 2명이 미국 정부로부터 ‘숙청’당했다. 김정남의 암살을 둘러싼 진실을 알고 있을지도 모를 2명의 한국계 여성 CIA 요원들은 미국 정가에서 사라졌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7년 전에 일어났던 김정남 암살 사건이 떠올랐다. ‘나비 효과’란 말처럼 모든 사실은 서로 연결되어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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