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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와 정치ㅣ윤효원ㅣ식민주의 청산, 1997년 중국의 홍콩과 1961년 인디아의 고아

 

윤효원 2024-10-4

윤효원 아시아 노사관계 컨설턴트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감사 |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연구위원

 

 중국은 외교적으로, 평화적으로 홍콩 회복


중국 영토인 홍콩이 영국 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하기 시작한 때가 1841년이다. 영국이 일으킨 1차 아편전쟁으로 홍콩섬이 영국의 수중에 넘어갔다. 청나라가 마약의 ‘자유’무역을 금지하자, 영국은 전쟁으로 응답했다. 1856~1860년 2차 아편전쟁에서 영국-프랑스 연합군은 베이징까지 진격해 청나라 황제의 여름궁전인 원명원을 파괴했다. 조선으로 치자면 창덕궁 비원을 박살낸 셈이다. 이 패배로 중국은 홍콩섬 북편에 위치한 구룡반도를 영국에 내줘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홍콩섬과 구룡반도 크기의 몇 배가 넘는 신계도 영국의 수중에 넘어갔다.


1899년 8월 4일, 홍콩 신계 핑산. 헨리 블레이크 영국 총독이 지역 인사들과 원로와 만나 영토 통치 원칙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_ 위키미디어 커먼즈)

1941년 성탄절에 영국은 홍콩을 일본군에 내줬다가 1945년 8월 30일 식민 권력으로 복귀했다. 이후 반세기에 걸쳐 런던에서 임명된 백인 총독이 부임했고, 어떠한 민주적 선거나 절차도 존재하지 않았다. 1980년대 들어 99년으로 약속된 신계 반환일이 다가오자 중국은 영국과 반환 협상을 시작했다. 양국의 외교적 담판을 거쳐 홍콩은 1997년 7월 1일 자정 중국에 반환됐다. 홍콩을 되돌려 받기 위해 중국은 주권 제한을 뜻하는 50년 기한의 ‘일국양제’를 받아들였다. 아무튼 무력 사용 없이 평화적으로 식민지를 회복하고 영토보전에 한 걸음 다가간 것이다. 중국 정부가 홍콩의 주권을 완전히 회복하기까지는 아직 23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 2047년 7월 1일 자정을 기해 ‘일국양제’를 유지할 외교적 의무는 완전히 사라진다.


인디아는 포르투갈의 뒤를 따라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이 침공해 왔다


중국의 영토 회복이 외교적 교섭을 통해 평화적으로 달성됐다면, 인디아의 영토 회복은 군사적 침공을 통해 이뤄졌다. 인디아에 유럽 제국주의가 침공하기 시작한 때는 1500년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장 먼저 출현한 제국주의는 포르투갈이었다. 탐험가로 알려졌지만 해적이나 다름 없는 바스쿠 다 가마 일행이 1498년 5월 20일 인디아의 서해안에 출현한 것이다. 포르투갈의 뒤를 따라 네덜란드·프랑스·영국이 잇달아 인디아를 침공했다.

우리는 인디아를 영국 식민지로만 알고 있다. 하지만 인디아에 가장 먼저 식민지를 건설한 포르투갈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20세기 후반까지 식민지를 유지했다. 포르투갈은 16세기 전성기 시절 포르투갈은 뭄바이 등 인디아의 요지를 차지했지만 이후 국력이 약해지면서 후발 제국주의에 넘겨주어야 했다.

영국이 인디아에 대한 식민 지배를 완성할 무렵인 19세기 중반에는 포르투갈의 식민지는 고아를 비롯한 몇 개 지역으로 영토가 축소됐다. 1947년 8월 15일 인디아가 영국에서 독립할 때에는 고아, 다만, 디우, 다드라-나가르 하벨리 4개 지역만이 포르투갈 영토로 남게 됐다. 그래도 이들 면적을 합하면 제주도의 2배, 홍콩의 4배가 넘었다.


무장투쟁


인디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포르투갈 식민지로 남은 영토를 되찾자는 국민주의 운동이 거세졌다. 우익과 좌익이 합작해 포르투갈 식민주의를 종식시키기 위한 운동에 힘을 모았다. 고아통일전선·고아인민당·국민운동해방기구 등의 좌익단체, 그리고 국민의용단(RSS) 같은 우익 단체들이 무장투쟁을 준비했다. 다드라 지역의 경우 포르투갈 공권력은 경찰 3명에 불과했다.

민병대 무장조직과 인디아 군대가 진격하자 1954년 8월 11일 다드라-나가르 하벨리에서 식민당국이 항복했다. 하지만 1974년까지 서방제국은 이 합병을 인정하지 않았다. 1960년 4월 국제사법재판소(ICJ)는 포르투갈이 이 지역에 대한 주권을 갖고 있다는 식민주의 판결을 내렸다.



인디아 군대가 고아 해방을 위한 '비제이 작전' 개시


1961년 12월 17일 인디아 군대가 여전히 포르투갈이 식민지를 유지하고 있던 고아, 다만, 디우를 침공했다. “고아 해방”을 위한 “비제이 작전”이 개시된 것이다. 비제이(Vijay)는 힌디어로 승리라는 뜻이다. 원래 인디아의 네루 수상은 고아 지역의 민중운동과 국제사회의 압력을 통해 평화적으로 식민지를 돌려받으려 했다. 하지만 살라자르 독재 치하에 있던 포르투갈의 입장은 완강했다. 리스본 당국은 “1510년 이래 고아는 포르투갈의 영토”라는 입장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인디아의 군사적 압력이 커지자 고아 식민당국은 본국에 평화적 해결을 건의했다. 하지만 수도 리스본에서 온 회답은 “항복은 없으며 투항도 없다. 모든 기반시설을 파괴하고 최후의 일인까지 싸우라. 승리 아니면 죽음!”이라는 내용이었다.

독재자 살라자르는 고아의 식민당국 총독인 바살로 실바에게 8일을 버티면 서방의 군사적 개입이 있을 것이라 설득했다. 북대서양조양기구(NATO) 회원국이었던 포르투갈은 미국과 나토의 참전을 기대했다. 하지만 실바 총독은 인디아 군대가 침공한 다음날 바로 항복해 불필요한 인명 살상을 막았다.

리스본 당국은 아프리카 식민지였던 앙골라와 모잠비크에서 군대를 빼내 고아에 보낼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소련과 쿠바의 지원을 받던 앙골라와 모잠비크 민족해방군에게 아프리카 주둔 포르투갈군이 밀리던 전세로 인해 이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다. 수에즈 운하를 지나려던 포르투갈 해병대 군함을 나세르 장군이 통치하던 이집트 정부가 막아섰다. 인디아와 적대 관계에 있던 파키스탄 영공을 통해 전폭기를 보내려던 계획도 파키스탄 정부가 거부했다.

‘비제이 작전’은 1961년 12월 17일 아침 9시 45분에 시작돼 사흘째인 19일 아침에 끝났다. 인디아가 군사력을 동원하자 450년 가까이 이어지던 식민체제가 무너지는 데 45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고아 해방 작전과 더불어 디우와 다만에 대한 해방 작전도 개시됐다.


유엔에서 벌어진 대립


12월 18일 포르투갈 정부는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 침공 규탄 결의를 요청했다. 미국, 영국, 프랑스, 터키, 칠레, 에콰도르, 대만이 포르투갈을 지지했다. 소련과 실론(지금의 스리랑카)이 반대했고, 아랍연방공화국과 라이베리아가 기권했다. 포르투갈은 “자국 영토에 대한 인디아의 군사적 도발”을 비난했고, 인디아는 “포르투갈이 불법적으로 점령한 인디아 영토의 불가분성”을 주장했다.

미국, 영국, 네덜란드 같은 서방은 인디아의 군사적 침공이 유엔 헌장에 위반이라며 포르투갈 편을 들었다. 식민지 해방전쟁을 벌이던 아프리카 대표들은 인디아를 지지했다. 소련도 “자본주의적 약탈”을 끝낼 때가 됐다며 인디아를 거들었다. 중국은 “제국주의 식민 지배에 대한 아시아와 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인민의 투쟁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1974년 4월 25일 ‘리스본의 봄’ 혁명이 일어나 살라자르 독재가 타도됐다. 이윽고 포르투갈의 민주 정부는 과거 식민지 영토에 대한 주권이 인디아에 있다고 선언했다.


20세기 후반에도 중국과 인디아에 잔존했던 식민주의에 대한 청산은 중국의 경우 외교라는 평화적인 수단을 통해, 인디아의 경우 군사적 침공이라는 폭력적인 수단을 통해 달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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