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쇠퇴와 중국 부상의 필연적 과정을 분석한 키쇼르 마흐부바니의 『중국은 승리했는가?』에서, 미국은 현실을 직시하고 협력을 선택하여 새로운 질서를 수용해야 한다는 점을 제시하고 있다.
윤효원 2025-1-23
윤효원 아시아 노사관계 컨설턴트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감사 |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연구위원
키쇼르 마흐부바니(Kishore Mahbubani)는 싱가포르 출신의 외교관이자 국제관계 전문가로 아시아와 서구 간의 관계를 분석하는 데 주력해 온 학자이다. 싱가포르국립대학교 리콴유공공정책대학원(Lee Kuan Yew School of Public Policy)에서 교수 및 학장을 역임했으며, 싱가포르 외교부에서 30년 이상 근무하며 다자 외교 분야에서 활동했다. 유엔 싱가포르 대사를 두 차례 역임했으며, 2001년과 2002년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UNSC) 의장을 맡기도 했다.
내가 마흐부바니의 존재를 알게 된 계기는 인도네시아 출장 중에 자카르타의 수카르노-하타 국제공항 서점에서 구입한 Has China Won?: The Chinese Challenge to American Primacy라는 책 때문이었다. 2020년 3월 31일 미국의 퍼블릭어페어스 출판사에서 나온 이 책은 우리말로 『중국은 승리했는가?: 미국의 패권에 대한 중국의 도전』으로 번역할 수 있겠다.
중국의 부상을 거부하고 중국을 혐오하는 내용의 책들이 수두룩한 해외 서점에서 중국을 선두로 한 아시아의 부상과 세계 질서의 변화를 예견한 이 책의 내용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듯한 반가움을 안겨 주었다.
미국이 쇠퇴하는 이유
마흐부바니는 중국의 부상과 미국의 쇠퇴가 필연적 과정이라고 본다. 미국의 쇠퇴가 외부에서 가해지는 도전보다 내부에서 무르익은 문제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이 봉착한 첫 번째 내부 문제는 '냉전적 사고방식의 지속'이다. 미국은 중국을 소련과 같은 방식으로 대하려 한다. 즉 군사적 봉쇄와 경제적 압박을 통해 중국의 부상을 억제하려 한다. 하지만 소련과 달리 중국은 경제적 성장을 바탕으로 글로벌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미국의 제재와 봉쇄는 중국의 성장 동력을 억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두 번째 내부 문제는 '사회경제적 양극화와 정치적 분열'이다. 민주당과 공화당 간의 정치적 대립은 날로 악화되면서 미국식 대통령제와 양당 정치의 역사적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여기에 인종 갈등과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면서 사회적 결속이 약화되고 있다. 21세기 들어 클린턴, 부시, 오바마, 트럼프, 바이든, 트럼프로 이어지는 잦은 정권교체는 미국이 장기적이고 전략적인 국가 차원의 결정을 내리기 어려운 상황을 야기하고 있다.
미국의 세 번째 내부 문제는 '과도한 군사 개입'이다. 해외 군사 개입은 미국 국내의 경제적 자원을 과도하게 소모하고 있다. 이라크, 시리아, 리비아, 이스라엘, 이란, 아프가니스탄 등에서의 군사적 개입은 미국의 자원을 외부 문제에 낭비하는 패착으로 이어졌다. 반면 중국은 군사적 패권에는 관심이 없고 경제적 협력을 통해 점진적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제국주의 국가의 두드러진 속성이 정치군사적 압력을 통한 경제적 이익의 확보라 할 때, 미국과 달리 중국은 제국주의 국가로서의 특징을 갖고 있지 않다.
미국의 네 번째 내부 문제는 '기술 패권의 상실'이다. 중국의 화웨이, 텐센트, 알리바바, BYD와 같은 기업들이 글로벌 시장에서 점유율을 확대하며 미국의 패권적 우위를 위협하고 있다. 특히 5G, 인공지능(AI), 반도체, 전기자동차 산업에서 중국은 독자적인 기술 생태계를 구축해 놓고 있다.
중국의 성공 요인
마흐부바니가 보기에 중국이 성공하는 이유는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전략을 수립하고 실행할 수 있는 국가의 역량 덕분이다. 일당 지배를 특징으로 하는 중국 정치의 특성을 고려한다면 중국공산당의 지도 덕분이라 할 수 있다. 중국공산당은 이념적 접근보다는 실용적 접근을 통해 글로벌 수준의 영향력을 점진적으로 확대하고 있다.
마흐부바니가 꼽는 첫 번째 성공 요인은 '중국의 경제적 성장과 기술 혁신'이다. 가장 대표적인 정책이 ‘중국제조(中国制造)2025’다. 2015년 발표된 이 정책은 △반도체, 로봇공학, 바이오 의약품, 신재생 에너지 등의 첨단산업에서 핵심기술의 국산화, △차세대 정보기술(AI, 5G), 첨단로봇, 항공우주장비, 해양공학 및 첨단선박, 선진철도 교통장비, 신에너지 및 친환경 자동차, 전력 설비, 농업 기계, 신소재, 바이오 의약 및 고성능 의료기기 등 10대 전략산업의 집중 육성, △연구개발 투자확대와 혁신역량 강화, △스마트 제조 및 디지털화 추진, △친환경 및 지속가능성 강화로 요약된다. 이를 통해 중국은 글로벌 경제체제에서 독자적인 공급망을 구축함으로써 미국의 글로벌 지배력을 줄이고 있다.
중국의 두 번째 성공요인은 ‘일대일로(一帶一路, Belt and Road Initiative, BRI) 전략'이다. 중국이 추진하는 글로벌 경제 협력 및 인프라 개발 프로젝트인 일대일로는 2013년 시진핑 주석이 처음 제안했다. 중국을 중심으로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거대한 경제 회랑을 구축해 무역과 경제 협력을 강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를 통해 글로벌 경제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개발도상국들과의 협력을 강화함으로써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잠식하고 있다.
세 번째 성공 요인은 '중국식 통치 모델의 성공'이다. 중국공산당은 일당지배에 기초한 중앙집권적 통치를 통해 정책의 일관성과 장기적 계획성을 확보하려 노력하고 있다. 이 사례는 미국식 민주주의 모델이 정치적 불안정성을 초래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를 통해 장기적 정책을 신속하게 시행할 수 있는 국가의 능력은 안정적인 경제 성장의 기반이 되고 있다.
특히 미국 모델이 정치적 불안정과 예측 불가능성을 초래하는 것과 달리, 중국 모델은 정치적 통제와 사회적 관리를 통해 일관된 발전을 유지하고 있다. 중국 모델은 다년간 계획에 의해 추진되는 경제발전 전략을 가능케 함으로써 국가 정책이 장기적 목표를 갖고 지속적으로 추진될 수 있도록 만든다. 또한 정부 주도의 대규모 기술 혁신과 인프라 프로젝트는 기술과 인프라에 대한 집중 투자를 가능케 해 경제성장을 가속화하고 국제 경쟁력을 높이는 데 기여해 왔다.
미국이 가야 할 길
마흐부바니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대결이 아닌 협력의 길을 선택하는 것'을 미국의 첫 번째 과제로 강조한다. 미중 간 협력적 공존은 장기적인 평화를 위한 필수 과정이다. 미국은 유럽과 아시아의 기존 동맹국들과의 협력을 강화하는 한편, 중국과의 상호협력을 모색해야 한다. 미중 두 나라는 기후변화, 보건 위기, 글로벌 금융 안정에서 서로 협력할 여지가 크며, 이를 통해 군사적 대립을 피하고 경제적 상호 의존을 강화해야 한다.
미국의 두 번째 과제는 '내부 개혁을 통해 글로벌 경쟁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교육 개혁, 기술 혁신, 인프라 개선을 통해 장기적인 경쟁력을 확보함으로써 정치 혼란을 극복하고 구조 개혁을 단행할 수 있는 기초체력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단기적 이익이 아닌 장기적 관점에서 경제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
세 번째로 마흐부바니는 미국이 '중국과의 군사적 대결이 아니라 경제적 협력에 나설 것'을 촉구한다. 이를 통해 상호 의존 관계를 구축하고 안정적인 국제 질서를 형성해야 한다. 중국과의 경제 협력은 미국에게도 이익이 될 수 있음을 인식함으로써 이를 통해 양국 간의 신뢰를 재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
세 가지 시나리오
마흐부바니는 『중국은 승리했는가?』에서 미국의 쇠퇴와 중국의 부상이 피할 수 없는 현실임을 강조하며, 미국이 중국과 협력하는 새로운 질서를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존의 패권 유지를 위한 대립적 접근은 비효율적이며, 상호 협력을 통해 글로벌 안정을 도모하는 것이 미래의 과제라는 것이다.
마흐부바니는 미중 경쟁의 미래를 세 가지 시나리오로 전망한다. 첫 번째는 대결 시나리오다. 두 번째 시나리오는 새로운 양극 체제의 형성이다. 미국과 중국이 각각 다른 동맹 네트워크를 구축하면, 글로벌 수준에서 기술과 경제 체제가 분리될 가능성이 있다. 세 번째 시나리오는 가장 바람직한 것으로 협력과 공존이다. 미중의 화해로 기후변화, 전염병, 사이버 보안 등 글로벌 문제에서 협력하는 모델이 등장할 수 있을 것이다.
마흐부바니는 미국이 중국의 부상을 평화적으로 수용함으로써 △동맹 재구축을 통해 유럽, 일본, 한국과의 협력을 강화하고, △내부 개혁을 통해 교육과 인프라 투자를 강화해 기술 경쟁력을 높이고, △이념 중심의 전략이 아닌 현실 중심의 전략을 채택해 대결보다는 협력의 가능성을 모색할 것을 강조한다.
키쇼르 마흐부바니의 『중국은 승리했는가?』에서 아쉬운 대목은 미국이 중국의 부상을 얼마나 수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논의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2035년 전후로 예상되는 중국의 제1경제대국 부상을 미국은 평화적으로 용인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군사적으로 중국의 부상을 억제하려 할 것인가.
안타깝게도 미국이 제1경제대국 중국이라는 새로운 글로벌 질서를 평화적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다시 위대한 미국을 만들자’는 마가(MAGA)를 기치로 내건 트럼프 정권의 귀환은 바이든 정권 시기 고조된 미중 간의 정치군사적 긴장을 한층 더 악화시킬 가능성이 크다.
2기 트럼프 정권에서도 미국이 여전히 냉전적 이념에 갇혀 있다면 글로벌 정세는 평화보다는 폭력으로 치닫을 가능성이 크다. 어느 쪽이든 최종 승자는 중국이 될 것으로 보이는데, 정치군사 정책의 전략적 인내와 사회경제 정책의 장기적 접근이라는 측면에서 국가 역량을 미루어 볼 때 중국 모델이 미국 모델을 앞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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