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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오북ㅣ『녹색 계급의 출현』ㅣ아직도 녹색이 되지 못한 인간들이여

 

이유경 기자 2024-06-06

     

브뤼노 라투르, 니콜라이 슐츠 저, 『녹색 계급의 출현』을 읽다


기후 위기와 생태계 문제를 논할 때 종종 좌파냐는 질문을 듣는다. 변화와 안정 중에서는 변화를 선호하면서 월급을 받고 살아가는 노동자이기에 좌파라고도 답할 수 있겠지만, 솔직히 환경 문제가 좌우와 무슨 연관이 있나 싶다. 인류 생존의 문제를 논하는데 좌우나 따지고 있을 거냐는 반문은 아니다. 정치생태학의 위상을 알지 못할 뿐이다. 개발도상국보다는 선진국들이 생태 보전을 논하므로 우파인가? 새롭게 형성된 히피들이 관심을 가지므로 좌파인가? ‘가치소비’에 더 많은 돈이 소요되므로 부르주아 계급이 더 가까운가? ‘기후 약자’가 결국 사회적 약자와 동일하니, 무산자 계급에 더 가까운가?

   

“자연을 보호하자”는 호소는 사회 갈등을 낳는다


“자연을 보호하자”는 호소는 사회 갈등을 줄이거나 끝내기는커녕 반대로 사회 갈등을 늘렸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자연에 관해 말한다는 것은 평화협정에 서명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대륙과 온갖 층위에서 일상생활의 모든 영역에 많은 갈등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자연은 통합을 고취하기는커녕 분열을 조장한다. (녹색 계급의 출현, 12p)


‘한약 먹어서 고기 먹지 말래요’, ‘요즘 건강식 해요.’라고 말하면 아무도 채식에 반감을 표하지 않지만 환경과 동물을 생각한다고 말하면 득달같이 유난이라는 반응과 온갖 비난이 돌아온다. 첨부한 밈(meme)을 보면, 한국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정크푸드를 먹고, 담배를 피고, 술 취하러 가는 것은 괜찮지만 채식을 하면 뼈가 삭고 세상에 큰 위협이 닥친다. 제로웨이스트 운동도 비슷하다. 기후 위기가 심각하다는 것엔 모두가 동의하지만, 예전 직장에서 일회용품 쓰지 말자고 건의했을 때 모두가 난색을 표했다. 당장 사는 것도 힘든데 일회용품 하나 안 쓰는 게 환경에 얼마나 도움될 것 같냐는 말이다. 어차피 개인의 노력은 세상에 도움을 주지도 않고 기업이랑 국가가 알아서 노력해야 할 일이라는 사람도 많다. 그렇다고 사회적 변화를 쌍수를 들고 환영하진 않는다. 카페 내 일회용품 사용 규제가 시작되었을 때, 먹다 나갈 건데 왜 머그컵에 주냐는 사람부터 종이 빨대는 질감이 더러우니 플라스틱 빨대를 내놓으라는 사람까지 온갖 진상을 다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고작 몇 년 불편했을 뿐인데, 현 정권에서는 일회용품 사용 규제를 백지화했다.


인터넷을 떠돌아다니는 밈
인터넷을 떠돌아다니는 밈

환경 문제의 피아 식별과 녹색 계급의 출현


우리는 환경 문제에 있어 모두가 가해자이자 피해자이다. 환경 파괴 문제를 논할 때 내가 공격받은 기분이 드는 것도 정상이고, 왜 정부랑 기업이 손 놓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다며 힐난하는 것도 정상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후 위기 대응의 움직임은 거의 교육적 차원이나 캠페인 차원으로만 존재해 왔다. 실제로 생태주의가 계급으로까지 이어질지 잘 모르겠지만, 세계적으로 환경운동가가 노동운동가보다 더 많이 살해당하고 있다는 점에서 환경 운동의 투쟁적 성격을 배제하긴 어렵다.


그렇다면 녹색 계급이란 무엇인가? 요약하자면 ‘생산’보다는 ‘생성’에 초점을 맞춘, 지구 차원의 거주 가능성에 대한 투쟁을 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이들에게는 생산 수단 소유에 따른 경제적 위치보다 거주 가능성에 대한 영토적 위치가 더 중요하다. 착취는 노동이 아닌 타자의 땅을 착취함으로써 생기는 영토적 이윤이다. 녹색 계급의 적은 나의 영토를 점유한 자들이다. 착취와 희생에 반대하고 생산의 팽창을 저지하려 한다는 점에서 녹색 계급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좌파이며 마르크스주의를 확장하는 새로운 움직임이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녹색’ 계급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정치‘생태’학을 논하면서 너무도 인간 중심적인 사고를 답습하고 있다. 거주지에서 오는 편리함과 이윤을 위해 투쟁한다는 말에는 인간 외의 모든 종이 소외되었으며, 지구 또한 인간의 수단으로만 존재한다. 지속적인 투쟁과 진보에 신념이 중요하다면,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녹색 계급이 생태주의 전선에 뛰어들 만한 신념을 형성해 줄 순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감히 ‘녹색 계급’에 대한 논의가 더 진전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밝혀 본다. 지난 대선과 총선의 공약들은 보전보다는 경제 성장을 논하며 여전히 우리의 수준이 ‘지구화’보다 ‘근대화’에 머무르고 있음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녹색 계급의 실존 여부조차 불확실한 세계에 살고 있다. 좌절감을 느끼긴 이르다. 그동안 인간이 환경을 망쳐 놓은 시간이 얼마인가? 이제야 녹색 계급이니, 정치생태학이니 하는 논의가 나오는 지금이 생태주의가 인류의 목표가 되기 위한 직전의 때일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소망을 덧붙이자면, 이 다음의 ‘녹색’ 논의는 자의식 과잉 인간이 아닌 ‘녹색’ 존재로서 진전시켜 나갔으면 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생태계의 일부이며, 지구를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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