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경 2024-07-12
멕시코에서 원주민공동체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원주민 사회에 대한 관심을 출발점으로 삼아 탈식민주의 관점에서 라틴아메리카의 역사, 문화, 사회, 정치 등에 대해 연구하고 강의한다. 옮긴 책으로는 『식인의 형이상학』(2018), 『깊은 멕시코: 부정당한 문명』(2021), 옮기고 쓴 책으로 『세계의 종말을 늦추기 위한 아마존의 목소리』(2024) 등이 있다.
2024년 멕시코 대선: 셰인바움의 예견된 당선
멕시코 현지 시간으로 2024년 6월 2일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당일 밤 23시 30분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파르도(Claudia Sheinbaum Pardo)의 당선이 확실시되었다. 현지 언론은 물론이고 국내 언론 대부분도 200년 가까운 공화국 역사상 첫 번째 여성 대통령의 탄생을 알렸다. 명사의 남성형과 여성형을 구별하여 사용하는 에스파냐어의 특징을 생각해보면, 남성형인 presidente뿐 아니라 여성형 presidenta에도 대통령이라는 뜻이 추가되었다. 그러나 셰인바움의 당선도, presidenta에 대통령이라는 뜻이 덧붙여진다는 사실도 그다지 놀랍지 않다. 선거 1년 전인 2023년 7월부터 진행된 모든 여론조사에서 셰인바움은 지지도 조사에서 부동의 1위를 지켰다. 그저 1위가 아니라 2위와 20~30%포인트 차이를 보이며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셰인바움과 좁힐 수 없는 차이 속에서도 제2의 정치세력을 대표했던 야권 후보 역시 소치틀 갈베스(Xóchitl Gávez)라는 여성 후보였다. 그러므로 이미 1년 전부터 멕시코는 여성 대통령을 맞이할 예정이었고, 그 가운데 셰인바움을 기다리고 있었던 셈이다. 2024년 멕시코 대통령 선거에 드라마틱한 요소는 없었다.
2024년 6월 2일 멕시코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 연설을 하는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파르도 당선자. 사진_ Claudia Sheinbaum(facebook)
정치인을 만난 과학자
셰인바움은 2000년 정치계에 들어섰다. 그해는 멕시코 정치사에서 중요한 기점이었다. 1930년부터 이어온 제도혁명당(PRI)의 70년 집권이 막을 내린 해이기 때문이다. 제도혁명당은 말그대로 1910년 발생한 멕시코 혁명을 제도화하여, 혁명이 야기한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면서 탄생한 정당이다. 그러나 여야교체 없이 이어진 70년간의 일당 체제는 멕시코 사회의 혁신을 가로막고 있었다. 2000년은 제1야당인 국민행동당(PAN) 소속 빈센테 폭스(Vicente Fox)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서 멕시코 현대 정치사에서 사실상 첫 번째 여야교체가 이루어진 해였다. 이와 함께 정치적 지형의 거대한 전환이 시작되었다.
그러한 전환의 출발점에 현 멕시코 대통령이자 셰인바움을 정치계에 입문시킨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Andrés Manuel López Obrador)가 있었다. 긴 이름의 앞글자를 따서 암로(AMLO)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로페스 오브라도르 대통령은 2000년 민주혁명당(PRD) 소속으로 멕시코시티 시장으로 당선되었다. 제도혁명당의 장기집권과 권위주의에 맞서 1989년 진보적 정치인들의 연합으로 탄생한 민주혁명당은 이미 1997년 멕시코시티 시장 선거에서 승리하여 정치적 변화를 예고하고 있었다. 두 번째 좌파 시장으로서 로페스 오브라도르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메트로폴리탄 가운데 하나인 멕시코시티의 도시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멕시코시티 환경국장 적임자로 환경공학자를 물색했다. 당시 멕시코시티는 환경문제로 악명이 높았고, 도시 인프라의 부족으로 시민들의 삶의 질은 낮았다. 그때 로페스 오브라도르 시장에게 추천된 사람이 셰인바움이었다.
지난 6월 10일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당선자가 대통령실을 방문해 로페스 오브라도르 대통령(오른쪽)과 함께 걷고 있다. 사진_presidente.gob.mx
기술관료가 된 과학자
1962년 멕시코시티에서 출생한 셰인바움은 멕시코국립자치대학교(UNAM) 물리학 전공으로 1989년 졸업했다. 이후 에너지 공학 석사 학위를 받은 후 OECD 국가들과의 비교 연구를 통한 멕시코 가정용 전기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미국 에너지부 산하 국립연구소이자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운영하는 로런스 버클리 국립연구소에서도 4년의 시간을 보냈다. 에너지 공학자인 그는 사회적 현실과 동떨어진 채 연구실에 웅크리고 있는 과학자는 아니었다. 그의 친가와 외가는 모두 유럽에서 이주한 유대계였고, 그의 부모는 60년대 전 세계를 휩쓴 사회운동의 물결 안에서 함께 호흡하고 있었다. 그는 종종 자신을 68혁명의 딸이라고 묘사할 정도로 사회운동과 가까운 곳에서 자랐고, 1980년대와 1990년대 학생운동에 참여해 왔다. 진보적 정치운동과 에너지 공학자로서의 삶의 교차점에 있었던 셰인바움은 2000년대 진보정치에서 필요로 했던 진보주의적 기술관료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2005년 로페스 오브라도르의 시장 임기가 끝날 때까지 셰인바움은 시 환경국에서 멕시코시티 환경오염 문제의 해소와 도시 교통 기반 시설의 확충이라는 과제를 수행하며 성실한 관료의 삶을 살았다. 2005년 개통되어 멕시코시티의 교통체증을 완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 외곽순환도로의 고가도로 건설 등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고 알려졌다. 그후 그는 학계로 돌아가서 기후변화와 관련된 활동을 해나가는 동시에 정치 활동도 함께 이어갔다. 2006년과 2012년 로페스 오브라도르의 대통령 선거전에서 대변인을 맡았고 2015년에는 자신이 자랐던 구의 구청장에 당선되었다.
과학자가 정치를 할 때
그가 멕시코 정치 무대 한가운데 서게 된 것은 2018년이다. 2018년 7월 1일 로페스 오브라도르는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셰인바움은 멕시코시티 시장으로 당선되었다. 셰인바움의 정치적 성장은 멕시코 정치 지형의 변화와 맥을 함께한다. 2000년 이후 멕시코 정치 지형의 변화가 없었다면 셰인바움이 정치계로 발탁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성실한 학자로서, 기술관료로서 그의 활약이 없었다면 진보 정당이 정치 무대에 단단히 뿌리 내리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는 멕시코시티가 직면하고 있는 두 가지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한 덕분에 정치적 입지를 단단히 다질 수 있었다. 한 가지는 과밀화된 도시의 교통 문제였고, 다른 한 가지는 치안과 안전 문제였다. 그는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단발적인 정책을 밀어붙이기보다 기초를 다지는 정책에 집중했다. 교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교통 시스템을 차근차근 확충하고 개선했다. 치안 문제에 대해서는 공권력을 강화시켜 폭력을 증대시키는 방법을 선택하기보다, 불법 무기의 자진 반납을 유도하고, 교육 시스템을 강화하는 근본적 대안에 집중했다. 그는 실무 능력을 갖춘 정치인이라기보다는 정무적 감각을 갖춘 과학자다.
대통령이 된 과학자에 거는 기대
그가 대통령 선거에서 제시한 핵심 공약 5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치안 확보, 둘째 무상 교육과 과학 교육, 셋째, 빈곤 퇴치와 불평등 감소를 위한 최저임금 인상과 사회정책의 우선시, 넷째, 수자원 관리의 법제화, 다섯째, 에너지 전환을 통한 물, 전기, 가스 요금 인하이다.
지난 7월 9일 다국적 은행과 글로벌 금융 서비스 기관으로 구성된 국제통화회의(IMC) 연례회의에서 국가 프로젝트를 발표하는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대통령 당선자. 사진_ claudiasheinbaum.mix
그는 진보 정당의 가치를 공유하다. 그에게 우선시 되는 것은 빈곤하고 소외된 자들의 삶이다. 그리고 모두의 인간적인 삶을 위해 환경과 에너지 정책이 갖는 중요성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환경과 에너지 정책은 새로운 산업 부문의 성장이나 새로운 에너지 시장을 만들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환경을 착취하면서도 그 환경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 에너지를 소비하면서도 에너지 산업이 만들어 내는 삶의 조건을 감수해야만 하는 바로 우리와 같은 사람들의 삶과 직결된 것이다. 그래서 셰인바움은 공기, 물, 토양 등 각 환경적 요소에 대한 정책적 대안을 제시한다. 오염된 수자원을 복원시킬 것을 약속하고, 치명적인 환경 오염을 야기하는 프랙킹 기술을 이용한 석유 채굴과 광산의 노천 채굴을 제한하는 현재 멕시코 정부의 기조를 유지할 것을 약속한다. 에너지 전환을 당면한 긴급한 과제로 인식하며 태양광, 풍력, 수력, 지열, 수소 발전소 등의 대안적 모델을 제안하고 주택과 상업 시설에 태양열 패널 보급 정책을 제안한다. 여기에는 탄소 배출 감소와 화석 연료 대체를 위한 기술적 제안들도 포함된다.
전 세계 에너지 시스템의 주요 목표가 주권, 접근 가능한 저비용 에너지, 환경 영향 감소, 위기 대응 능력에 있다며, 멕시코의 연방전기위원회(CFE)가 이를 충족하고 있다고 답하는 클라우드 셰인바움 당선자. 사진_ Claudia Sheinbaum(facebook)
셰인바움에게 환경 정책과 에너지 정책은 세계적 트렌드를 따라간다는 의미에서 마련된 감각적이고 정책 공약이 아니다. 전혀 드라마틱하지 않았던 2024년 멕시코 대통령 선거 결과가 파장을 불러일으키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시장의 관점이 아닌 인간의 관점에서 환경을 사고하려는 과학자의 정치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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