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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ㅣ논, 아름다운 생물다양성의 보고

 

박진희 2024-05-31


박진희

로컬의 지속가능성 활동가

(재)장수군애향교육진흥재단 사무국장

초록누리 협동조합의 이사장 역임

한국농어민신문, [박진희의 먹거리 정의 이야기] 연재


 

초여름 밤, 논이 있는 풍경


대학생 때, 한동안 답사 모임에 가입해 답사를 다닌 적이 있다. 주로 문화유산을 보러 다녔는데, 화순 운주사로 가는 일정 중 모임 회원인 K님의 고향 구례에 들르게 되었다. 구례에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다랭이논을 보게 되었는데, 경사를 따라 구불구불 이어지는 논이 너무 아름다워서 한동안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세월이 흘러 귀농하게 되고, 논농사도 짓게 되었다. 우리는 해마다 우렁이 농법의 농사를 지었는데 우렁이를 논에 넣어 주는 날에는 아이들도 신이 나서 논으로 뛰어나왔다. 모판에 볍씨를 넣어 모를 키우는 일도, 이앙기가 논을 다니며 모내기를 하는 모습도, 황금 들판으로 논이 일렁이는 것도, 추수하는 광경도 모두 그림처럼 예뻤다. 추수를 마치고 나면 벼가 있던 자리마다 새들이 내려앉는다. 태풍이 몰아쳐서 벼가 누우면 어쩌나 걱정하는 날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논을 보고 있노라면 사계절이 아름답게 흘러갔다.

다랭이논에 반하고, 논농사를 해본 사람이어서 그런지 6월로 접어든 농촌에서 만나는 가장 아름다운 풍경 중 하나는 논이라고 생각한다. 모내기를 마치고 잔잔히 물이 고여있는 논으로 산이 비치고, 하늘이 비치고 저녁에는 달과 별이 내려앉는다. 개구리 울음소리와 컹컹하고 어느 집 개 짖는 소리까지 울리면 초여름 농촌의 밤 풍경은 어느 노래 가사처럼 평화롭고 아름답기 그지없다.

밖에서 보는 논의 풍경도 아름답지만, 논으로 연결되는 생태계도 아름답다. 개구리, 두꺼비, 장구애비, 잠자리, 실지렁이, 우렁이, 왜가리 등 수없이 많은 생물들이 논에 기대어 살아간다. 사람도 논에 기대어 사니 논은 그야말로 생물다양성의 보물창고이다.


습지로서 논, 그 생태적 중요성


물을 안고 있는 논은 습지이다. 지난 2008년 창원에서 열린 ‘제10차 람사르협약 당사국 총회’는 논습지 결의안을 채택하기도 했다. 논습지 결의안은 논습지에서 나오는 수생 동식물이 농촌에 영양소를 공급하며, 부적절한 수자원 관리, 자연적 수로변경, 외래종을 포함한 새로운 생물의 도입, 유해한 화학물질의 다량 사용, 부적절한 논의 용도 변경 등이 논에 위협적인 요소가 되므로, 논을 주변의 자연습지 및 강과 연결해 통합 관리하는 것을 당사국 협력 사항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당시에 이 결의안 채택이 쉽지 않았다는 뉴스가 보도되곤 했는데 결국 채택된 것을 보면 습지로서의 논의 생태적 중요성이 결코 무시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국제사회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쌀을 주식으로 하는 나라들은 기후 위기 시대 논의 생물다양성 증진을 위한 정책적 조치를 취하기도 하고, 학자들은 농법에 따라 논의 생물다양성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연구하기도 한다. 어떤 공동체와 학교에서는 논농사를 통해 생물다양성을 배우는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한다.



전남 신안군 팔금도 친환경 농경지에서 발견된 멸종위기식물(2등급)이자 국가생물적색(취약) 식물인, '매화마름' 군락지. 사진_신안군 제공


논습지에 ‘매화마름’ 군락지가 있다


올해 5월, 논의 생물다양성과 관련한 좋은 소식들이 있었다. 신안의 친환경 논 경작지에서 국내 서해안을 중심으로 논 경작지에서 제한적으로 분포하는 ‘매화마름’의 군락지가 발견되었다. ‘매화마름’은 국내 멸종위기식물(2등급)이면서 국가생물적색(취약) 식물인데 이번에 발견된 군락지 면적은 3만3000㎡에 이른다. 환경부는 묵논습지인 평두메습지가 람사르습지로 등록될 예정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평두메습지에는 삵과 담비 등 멸종위기 야생생물 4종을 포함해 총 786종의 생물이 서식 중이라고 한다. 더 이상 논농사가 이루어지지 않아도 논은 습지가 되어 알차게 지구를 지키고 있다. 기후 위기 시대, 논을 지키는 일은 먹거리를 지키는 일인 동시에 지구를 지켜 인간을 살게 하는 일이다.



신안군 팔금도 농경지에서 발견된, 매화마름. 사진_신안군 제공


탄소중립의 기지로서, 논


이토록 아름다운 보물창고에서 탄생한 쌀이 날마다 우리 밥상에 오른다. 밥을 먹는다는 것은 수많은 생명의 하모니와 조우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 쌀이 정치권으로 가면 이상하게도 정쟁의 대상이 된다. 양곡법 개정안은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탄소중립시대로 나아가자고 말하면서도 쌀생산량이 많으니 논을 밭으로 만들어 대체 작물을 심으라 하고, 쌀가격 안정을 위한 양곡법 개정안은 거부한다. 쌀은 이제 생산량만 봐서는 안 된다. 논의 가치를 보아야 한다. 탄소중립정책 백날 외치는 것보다 논을 지키는 일이 더 시급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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