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희 2024-03-14
박진희
로컬의 지속가능성 활동가
(재)장수군애향교육진흥재단 사무국장
초록누리 협동조합의 이사장 역임
한국농어민신문, [박진희의 먹거리 정의 이야기] 연재
귀농을 결심하다
전북특별자치도 장수군에 산다. 도시민이었는데 어느 날 남편이 귀농하고 싶다고 했다. 그 바람을 못 들어 줄쏘냐 하고, 2008년 거의 한 해를 가족 여행처럼 귀농지를 찾아다녔다. 그리고 2009년 3월, 장수군으로 귀농할 것을 결정했다. 지역만 결정하고 어디서 살아야 할지, 둘러보아도 찾기가 어려웠는데 지금 사는 집과 인연이 닿아 매매계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집을 산 뒤에 남편은 가족 중 제일 먼저 장수로 내려가 이사 올 준비와 농사 준비를 했다. 나와 아이들, 시어머니는 4월 초에 이사했다. 남편은 강원도 평창 출신이고, 나는 도시에서 나고 자랐다. 뉴스에서 보아 왔던 3월의 농촌은 아지랑이 피어오르고, 따뜻한 봄바람이 일고, 들녘에 일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분주하고, 봄꽃나무가 사방에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는데 고랭지인 장수에는 아직 추운 바람이 일었다.
사진 : 박진희 제공
감자를 심다
사람들이 장수는 4월에도 눈이 내릴 때가 있다고 했다. 난방은 10월에서 다음 해 4월까지 해야 한다고도 했다. 아, 우리는 추운 곳으로 왔구나! 우리가 산간 지역으로 귀농했다는 실감이 났다. 귀농을 했지만 막상 농사일을 하려고 하니, 나는 농사일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었다. 그러니 무슨 일을 어떻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막막하기만 했다. 하지만 감자의 고장, 강원도 평창이 고향인 남편은 달랐다. “감자를 심을 준비를 해야지!” 남편은 아이들과 내가 아직 장수로 내려오기 전에 감자 심을 준비를 해 두고 있었다고 했다. 우리보다 몇 해 앞서 농사를 짓기 시작한 이웃들은 무슨 농사를 준비하고 있나 보았더니 모두 감자였다.
감자? 어디까지 먹어봤니?
그동안 감자를 사고, 찌고, 썰고, 요리하고, 먹는 삶을 살아왔건만 씨감자가 있다는 사실을 귀농하고 나서야 알았다. 씨앗이 아니라 감자를 심어서 감자를 수확하는 것이라니! 이때까지 이런 것도 모르고 살았구나 싶었다. 우리가 심는 감자는 "수미"라고 했다. 감자의 품종이 정말 다양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지금은 대부분 수미라는 품종을 심지만 예전에는 남작, 홍감자 등 여러 가지 감자를 심어 왔다고 했다. 감자의 세계가 이렇게 다양하다고? 그저 감자를 먹어온 날들의 내가 슬며시 부끄럽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우리 농사에 소질 있나 봐!
장수에도 봄은 왔고, 따뜻한 바람이 일렁거렸다. 쏟아지는 햇볕, 살랑이는 바람, 어느 날들의 비를 맞으며, 우리가 심은 감자는 쑥쑥 자라났다. 아이들도 감자밭을 누비며 뛰어놀았다. 그해 감자꽃을 처음 보았다. 꽃을 뚝뚝 따주면 더 실하게 자란다던데, 감자꽃을 보는 재미와 신기함에 차마 떼어내지 못하고 많은 꽃을 그냥 지나쳤다. 남편도 이런 나를 못 본 척해 주었다. 그래도 감자는 다 토실토실 실하게 자랐다. 일복을 단단히 입고, 감자를 캐던 날, 힘든 줄도 모르고, 우리 가족 모두 신이 났다. “어머나 감자 큰 것 좀 봐! 우리는 농사에 소질이 있나 봐!”, “진짜 우리 집 감자다.”
사진 : 자주감자, 박진희 제공
감자는 우리에게 용기를 주고 생각을 열어주네
감자 농사를 짓고 나니, 어떤 농사도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중에 귀농 선배가 말하기를 “감자를 심고 모두들 기뻐하지! 누가 어떻게 심어도 대부분 잘되니까 감자 농사로 귀농을 시작해야 한다니까!”, “우리가 잘해서가 아니라 감자가 어디에서나 잘 자라니까, 그런 거라고? 그럴 리가 우리가 잘해서야.”라고 웃으며 우겨 보았다. 그런데 아무렴 어떠랴. 역사적으로 악마의 작물이라는 오해를 받은 세월이 길었지만 누구나 쉽게, 어디서나 잘 자라는 감자의 특징은 결국 인류의 구원 같은 작물이 되었다. 다음 해 우리는 홍감자를 구해서 심었다. 그리고 자주감자도 심었다. 어디서나 잘 자라고, 누구나 쉽게 심을 수 있는 감자의 특성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건 감자의 품종이 다양하기 때문이 아닐까? 홍감자도, 자주감자도 다 잘 되었다. 초보 농부에게 감자는 농사의 용기를 준 작물이고, 생물다양성에 대한 생각의 문을 열어준 작물이다. 봄바람 살살 불어오니 이제 곧 감자 심는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가득해질 들녘 풍경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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