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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희의 먹거리 정의ㅣ전환시대, 그리고 기후미식가

 

박진희 2024-04-18


박진희

로컬의 지속가능성 활동가

(재)장수군애향교육진흥재단 사무국장

초록누리 협동조합의 이사장 역임

한국농어민신문, [박진희의 먹거리 정의 이야기] 연재


 

메뉴가 한없이 증식하는 시대


나는 50대이다. 어릴 적 깨작깨작 먹는다고 어른들에게 혼난 기억이 여러 번이다. 먹는 것은 늘 귀했으므로 고봉밥을 쌀 한 톨 남기지 않고 싹싹 다 먹으면 ‘고놈 참 잘 먹는구나’하고 칭찬을 받았다. 물론 편식을 해서도 안 된다. 누가, 무엇을 주건 간에 남기지 않고 맛있게 잘 먹는 사람이어야 했다. 그것이 먹을 것이 부족한 시대에 먹을 것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였다.

세월이 흘러 청년이 되었을 즈음에는 패스트푸드 시대의 본격적인 서막이 올랐다. 햄버거를 자연스럽게 먹을 수 있어야 했다. 많이 먹어본 사람처럼 피자를 먹고, 스파게티도 포크에 둘둘 말아 자연스럽게 먹을 수 있어야 했다. 세계화의 추세에 발을 맞추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사회인이 되었을 때에는 햄버거도, 피자도, 스파게티도 일상적인 음식이 되었다. 그리고 쌀국수, 또띠야 같은 음식들도 스스럼없이 먹는 시대, 아는 메뉴가 한없이 증식하는 시대가 되었다. 나도 그 시대를 충분히 누리며 세상 모든 음식을 알고 있는 듯 먹고 마시며 살았다.


편의점 삼각김밥이 자연스러운 시대


내가 음식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을 하게 된 건 아이들의 엄마가 되고 나서부터였다. 여느 엄마들처럼 아이들에게 건강한 음식을 먹이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먹여야 할 것과 먹이지 말아야 할 것이 마음에서 늘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좋은 음식을 먹이겠다는 나의 다짐과 행동은 아이들이 커갈수록 난관에 부딪혔다. 아이들이 어린이집, 유치원, 학교를 다니는 나이로 성장하는 과정은 부모로서의 나의 바람과 다른 음식을 아이들이 먹게 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아이들이 청소년이 될 때 즈음에는 동네마다 몇 개씩 편의점이 생겼고,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을 먹는 일은 청소년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주는 대로 다 먹어야 하는 시대에서, 무엇이든 쉽게 먹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먹방은 식품을 산업이 아닌 자연으로 착각하게 한다


TV에서는 먹는 방송 프로그램이 앞다퉈 방영되기 시작했고, 유튜브의 먹방 채널이 인기 채널이 되었다. 미디어에서는 전국 방방곡곡은 물론이고 여러 나라의 맛있는 식당이 소개되고, 그 음식이 왜 맛있는지를 해설한다. 누군가는 맛있는 음식을 찾아 여행을 하고, 누군가는 얼마나 많은 양을 먹을 수 있는지 보여준다. 이런 미디어를 보고 있노라면 세상 모든 이가 미식가이고, 식량 빈곤에 놓인 이가 하나도 없는 것만 같다. 식품은 산업의 영역이 아니라 자연의 영역으로 착각된다. 기후위기는커녕 자연환경은 문제가 없이 늘 풍요롭고 농축수산물은 넘쳐나는 것 같다. 어느새 유명 요리사가 인기 스타가 되고, 먹방 크리에이터가 유망 직업으로 부상했다. 그러는 동안 최저임금을 받는 식품산업 노동자들의 노동이 잊혀지고, 기후위기 앞에 농사를 망치고 있는 농부들은 유령이 되었다.


기후미식러를 기다리며


지금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기후위기 시대이다. 기후위기 시대, 잘 먹고 잘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 미식은 누가 주도해야 하는 것일까? 자연과 사람에게 이롭고, 생산과정이 공정하며, 유전자 조작이 일어나지 않고, 전통적인 농축어업 방식을 존중하고 계승하는 것, 지역농업과 로컬푸드를 옹호하고, 생물다양성을 지향하며, 전통방식의 식생활을 지지하는 활동, 식량권을 중요하게 여기며, 음식을 통한 사회적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는 활동을 우리는 슬로푸드 운동이라고 부른다. 여기에 탄소 중립의 개념이 더해진다면? 우리는 이를 기후미식이라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기후미식의 관점에서 농업환경을 조성하고 먹거리 관계망을 해석하며, 식생활 교육과 활동을 할 대중적 전문가가 탄생해야 한다. 기후 미식을 설계하고 가르칠 기후미식가가 필요하다. 별다섯 개의 식당이 되기보다 기후미식 식당이 되고 싶은 사회를 제시하고, 먹방러가 아니라 기후미식러를 만들어갈 전문가가 양성될 수 있도록 정부와 민간이 먹거리 정책을 획기적으로 전환하기를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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