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경 기자 2024-05-30
카페에서 친구가 빨대를 들고 오면 ‘거북이 살려라.’, ‘북극곰 어떡할래?’ 따위의 농담을 하곤 한다. 인류는 마치 기후 위기의 당사자가 아니라는 듯 말이다. 과학자들은 2030년에서 2050년 사이에 인류가 멸망한다고 외치지만, 그래도 우리는 눈앞의 편리함에 이끌린다. 내일 멸망해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처럼, 북극곰과 거북이와 꿀벌과 인류가 다 같이 죽어가도 우리 인간들은 로켓배송을 이용하고, 1900원 짜리 아메리카노를 플라스틱 용기에 받아 출근한다. 우리와 비슷한 생활을 영위하는 인간으로서 윤태진 작가가 말하였다. “해냈어요, 멸망”
1초에 수천만 개씩 물건이 생산되지만 없어지지 않는다
인간은 살아있는 동안 인공물이 썩는 것을 볼 수 없다. 플라스틱, 비닐, 캔, 유리병, 하다못해 종이까지도 100년 안에 썩지 않는다. 새삼스러운 사실을 일깨우며 그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윤태진 작가가 중학생일 적, 기술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물건이 1초에 수천만 개씩 생산되지만 절대 없어지지 않는다.” 그때부터 물건이 만들어지는 것에 관한 공포를 느꼈다. 물건은 언젠가 버려질 텐데 그 많은 물건을 그럼 어찌한단 말인가? 버려진 물건을 길게 늘여 저 우주까지 닿게 하는 상상도 했다. 한 번은 물건의 여정과 끝을 알기 위해 쓰레기 처리장에 전화를 걸었다. 쓰레기 처리장 측에서 '보통, 단체 단위의 견학을 요청 받는데 개인의 견학 요청은 처음이다'라고 말하며 신기해 하였다. 마침 쓰레기가 적게 들어오는 시기이니 안내해 주겠다는 답변을 받아 경기도의 한 쓰레기 처리장과 재활용 분류장을 방문했을 때 그는 할 말을 잃었다.
쓰레기가 차곡차곡 분류되어 나란히 올라가야 할 공정 레일은 어마어마한 양의 쓰레기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결국 쓰레기는 아무렇게나 뭉쳐진 채로 던져지고 있었다. 강조하지만 쓰레기가 적게 들어온 날이었다. 명절에는 말 그대로 천장까지 쓰레기가 쌓인다고 하니, 쓰레기들이 집게에 잡혀 분쇄기로 들어가 태워지는 것 외에 방도가 없어 보였다. 귀찮다고 투덜거리며 페트병의 라벨지를 떼고, 색색 별로 쓰레기를 분류하여 깨끗이 씻어 내버려 봤자 현실은 한 데 섞여 태워질 운명이라니 그동안의 노력은 무엇이었을까?
악한 인간들이 운전하는 멸망행 특급 열차
“인간은 나아지지 않아요.” 윤태진 작가가 몇 번이고 강조했다. 순자의 성악설을 확신하는 그가 내게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을 때, 성선설을 믿는 나는 부끄럽게도 할 말이 없었다. 환경적 관점에서는 개선은 커녕 현상 유지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60억 지구에서 널 만난 건 7, 럭키야’를 외치던 때가 무색하게 세계 인구는 벌써 80억을 찍었고, 자본주의는 끝없이 소비를 부추기며, 인간은 계속해서 환경을 망칠 것이다. 역사와 신념과 어쩌고 저쩌고를 논해 봤자 인류가 끝없는 개발과 환경오염으로써 멸망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려웠다. 그가 말하길, 사람들은 하고 싶은 만큼만 환경을 위한다고 했다. 보통의 사람들은 환경 단체에 3만원을 기부하거나, 일회용품 사용을 하루 덜 쓰는 등 최소한의 변명과 실천 정도만 마련했을 뿐이다. 인간은 스스로에게 무척이나 관대하다. 그 결과가 기후 위기로 나타났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그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물으니 애초에 개인에게는 기대할 수 없단 답이 튀어나왔다. 환경 문제 해결을 위한 방법에 ‘존재하는 오염을 없애는 것’과, ‘소비를 하지 않는 것’ 두 방향이 있을 텐데, 전자는 기술력으로 해결한다 해도 후자는 어렵다. 인류에게 남은 선택지는 멸망이라는 결말을 향해 천천히 나아가냐, 빠르게 도달하냐 정도다. 멸망까지 남은 시간을 연장하는 것에는 구조적 변화가 필수 불가결하다. 개인은 너무도 작다. 그의 마음은 늘 무겁다. 정말 마음만 무겁다. 제대로 행동하지도 못하면서 멸망만을 기다리는 중이다. 그런 그의 마음은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의 단계 중 ‘수용’에 해당하는 것 같았다. 보통의 사람들이 고뇌조차 하지 않는 빈약한 ‘부정’ 단계에 머무르는 중이라면, 멸망을 수용한 그가 우리보다 훨씬 앞서 있을지도 모른다.
모순에 끌리는 모순적인 작가
어쩌다 환경 에세이를 쓰게 되었냐 물었더니 오래전부터 모순적인 것들에 끌렸다고 답한다. 살기 위해서는 환경을 보전해야 하는데, 살고 싶어 하면서 환경을 파괴하는 인간이 참 모순적이었다고 한다. 재미있게도 그런 윤태진 작가의 모습 자체가 모순으로 느껴졌다. ‘멸망아, 언제 오냐?’를 자조적으로 말하는 그의 모습과 달리 실은 누구보다 착실하게 분리수거를 하고 생태 다큐멘터리를 보며 슬퍼할 것 같은 느낌이랄까? 소비 지향의 자본주의와 인류 멸망을 논하던 중 ‘그럼 최근에 어떤 소비를 하셨어요?’라고 묻자, 한참 고민하며 ‘원래 뭘 잘 안 사요.’라고 답한다. 본인의 기질 상 물욕이 없을 뿐 딱히 환경을 위해 노력한 것은 아니라는데, 110만원짜리 일렉 기타를 사서 최소 40년을 살아간 나무를 죽였다는 나의 고백만 허공을 맴돈다. 요즘은 기후 위기 대응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였냐 물으니 ‘아내의 소비를 막고 있어요. 큰 소용은 없지만.’이라는 답변이 돌아온다. 나의 소비 내역이 투명하게 공개되지 않아 다행이다. 글로 표현하니 다소 심드렁해 보이지만, 윤태진 작가는 만나기 전부터 인터뷰가 끝나 헤어질 때까지 따뜻한 말투와 배려심으로 사람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사람이었다. 이렇게까지 따뜻한 염세주의자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 착해지기 위해 평생 노력해야 할 서글프고 악한 존재가 인간이라는 그의 말이 그가 평생 노력할 것임을 보증하고 있었다. 행여 아니어도 이 기사를 보면 약간의 죄책감과 함께 작은 노력을 하나라도 더 기울일 사람이리라.
“참 멋진 시절이었어. 모두가 환경을 위해 멋지게 노력했거든.”
방금의 소제목은 그의 에세이에서 발췌하였다.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일상을 영위할 거고, 하고 싶은 만큼의 환경 운동만 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이는 변함 없는 사실이다. 기만이고 자기만족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반복되는 일상에서 주변을 주의 깊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물건의 여정을 상상하고 다른 시각을 갖는 것만으로도, 멸망을 막는 작은 움직임이 시작된다. 이런 윤태진 작가의 목표와 염원이 내게는 인류가 선한 방향으로 나아가리란 희망이 되었다. 인류 단위의 팀 플레이 실패로 멸망을 향해 가속 페달을 밟는 지금, 윤태진 작가처럼 따뜻한 염세주의자이자 꿈꾸는 회의주의자들이 많아진다면 인류는 좀 더 오래 파란 하늘이 존재하는 일상을 보전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인터뷰를 들은 지구가 뭐라고 말할 것 같냐 물었다. “참 하찮은 대화를 한다.”라는 약간의 연기력 섞인 대답이 나왔다. 인간이 애초에 파괴하지 말아야 했는데, 많이 부족한 동물이라 어쩔 수 없단다. 그러니 인간이 지구에게는 참 하찮기 이를 데 없단 사실을 늘 주지하면서, 부디 모두 오래 살아남기를 바란다. 이 또한 매일같이 작은 노력을 누적 중인 윤태진 작가의 바람이었다. 이런 그의 바람처럼 기왕이면 "해냈어요, 멸망"보다 "해냈어요, 노력"인 미래가 오래 이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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